술 한 잔에 담긴 역사, 자연, 그리고 과학
술 애호가들에게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처럼 쉽게 매듭질 수 없는 해묵은 논정이 있다. 과일(포도)로 만든 와인이 먼저냐 곡물(귀리나 보리)로 만든 맥주가 먼저냐는 대표적인 논쟁거리 중 하나다. '와인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결정적인 증거는 이란 북부(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약 9천 년 전 포도나무 씨앗이다. 학자들은 이 포도가 야생종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재배된 포도라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이 시기에 와인 양조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리라 예상했다. '맥주가 먼저派'에게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이들은 문명이 동트기 전(대략 기원전 1만 년부터 8천 년까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계곡의 수렵 채집자들(수메르인의 조상들)이 곡물을 물에 푹 적시면 부드러워져서 묽은 귀리죽 같은 상태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유전자 수프에서 최초의 유전자가 '우연히' 탄생했듯이 숨겨둔 귀리죽 한 그릇이 효모가 풍부한 공기에 노출된 채 방치되었고 이것이 자연 발효를 통해 귀리 맥주로 변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기원전 4500년경 마침내 수메르인이 정착하면서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맥주라고 부를 수 있는 알코올음료에 관한 기록들을 많이 남겼다.
술에 관한 상징적인 작가인 헤밍웨이는 <오후의 죽음>이라는 책에서 "와인은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물건 중 하나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나타난 가장 자연스러운 물건 중 하나다"라고 표현했다. 헤밍웨이를 포함해 많은 예술가들이 와인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맥주가 와인보다 열등하다고 조롱하길 즐겼지만, 퓰리처상 수상 작가이자 고백 시의 선구자인 앤 섹스턴은 생각이 달랐다. 그녀는 <신과 이야기하는 엘러너 보일랜에게는>의 첫 행을 "신께선 갈색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부드럽고 묵직한 맥주처럼"이라고 썼다. 맥주는 와인에 비해 비교적 만들기 쉽고 저렴하다는 이유로 고급스러운 명성을 누리지 못했지만, 많은 예술가들의 영혼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누가 먼저인지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가 곤란하다. 이런 와중에 2000년대 초반 패트릭 E. 맥거번 교수와 그의 연구팀에 의해 '인류 최초의 술'이 발견되면서 학계와 주당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중국 허난성의 성도 정저우에서 동남쪽으로 약 250킬로미터 떨어진 '자후'라는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9천 년 전 토기에서 놀랍게도 술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분석 결과, 이 신석기시대 알코올음료의 주성분은 포도, 산사나무 열매와 꿀, 그리고 쌀이었다. 인류 최초의 술은 과일과 곡물에 꿀까지 한데 섞은 혼합주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인류의 조상들은 문명 발상지마다 그 지역에서 자라는 곡물이나 과일로 술을 만들어 마셨다. 인류의 역사는 술과 함께 시작되었다.
역사의 시계를 좀 더 빨리 돌리면 와인과 맥주만큼은 아니지만, 자욱하게 먼지가 내려앉은 '위스키 원조 논쟁'을 만나게 된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과연 위스키(Whisky 또는 Whiskey)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서 '발효된 곡물로 만든 술을 증류하고 나무통에 숙성한 알코올음료'가 바로 위스키다. 발효는 효모가 당분을 먹이로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을 말한다. 맥주, 와인, 막걸리 등이 모두 발효주이다. 증류는 알코올과 물의 끓는점을 이용해 발효를 통해 만들어진 알코올을 좀 더 순도(도수) 높은 알코올로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등이 증류주에 해당한다. 최초로 '증류'라는 발상을 떠올린 건 고대 그리스인들로 바닷물을 담수화하거나 향수용 에센스를 만들기 위해 고안되었다. 하지만 지속해서 알코올을 증류한 사람들은 이집트인들이었다. '알코올'이라는 단어가 초기 이집트인들이 눈 화장에 사용했던 검은 가루인 콜(kohl)을 의미하는 아랍어 'al-kohl'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증류의 이점은 분명했다. 냉장 시설이 없던 시대에 오래 두어도 쉬거나 상하지 않고 추운 날씨에도 얼지 않았다. 맥주에 비해 부피도 적었고 거래할 때도 훨씬 가치 있었다. 마지막으로 증류를 통해 얻은 순도 높은 알코올을 오크통에 숙성하면 투명한 알코올이 영롱한 황금빛으로 변한다. 아울러 위스키 맛과 향의 절반 이상도 이 과정에서 나온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우리가 흔히 만나는 위스키가 만들어진다.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던 조지 버나드 쇼조차 "위스키는 액체에 녹아든 햇빛이다"라고 극찬했던 이 알코올음료를 최초로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 이야기에는 근접해 있는 두 나라가 등장한다. 바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다.
위스키(Whisky)라는 말이 '우스키(usky)'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에는 대부분 이견이 없다. 논쟁은 ‘생명의 물’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쿠아 비테(Aqua Vitae)'가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우쉬기 바이(Uisge Beatha)’, 아일랜드 게일어로 ‘우스퀴바(Usque Baugh)’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게다가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건 유사한 발음에 철자만 조금씩 다른 단어가 대여섯 개나 된다는 사실이다. usquebae(1715년), uskebath(1713년), usquebagh(1682년), uscough baugh(1600년), iskie bae(1583년), uskebaeghe(1581년)와 같은 단어들이 문헌에 속속 등장했다. 가장 먼저 문헌에 나오는 ‘위스케바하(uisce betha, 1405)’는 스코틀랜드의 ‘우쉬기 바이’나 아일랜드의 우스퀴바(Usque Baugh)와도 확연히 달랐다. 실타래가 얽혀도 너무 얽혔다. 하나씩 풀어헤쳐 보자.
기록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Saint Patrick)' 덕분에 위스키가 탄생했다고 믿고 있다. 기독교 포교 활동을 위해 432년 무렵 아일랜드로 건너온 성 패트릭을 비롯한 수도사들이 이 지역에 증류 기술을 전파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생명의 물, 즉 우스퀴바라는 것이다. 수호성인 덕분에 위스키 원조 논쟁에서 아일랜드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 여기에 더해 1170년 아일랜드에 파견된 잉글랜드 병사들이 '아일랜드인들은 아쿠아바이타와 우스쿼바를 마신다'라고 보고했다. 문헌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아일랜드가 유리해 보였다. 가만히 앉아 당하기만 할 스코틀랜드가 아니었다. 1300년 부유하고 교양 있는 맥 바하(Mac Beartha) 가문이 스코틀랜드 서부 작은 섬 아일레이(Islay)에 정착했다.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가 아일레이 군주와 전투를 벌일 때 '생명의 물' 또는 '바하의 물'이라는 의미의 우쉬기 바이를 발견했는데, 이것으로 맥 바하 가문이 위스키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스코틀랜드가 전설을 들이밀 때 아일랜드에 유리한 최초의 기록이 등장했다. 14세기 아일랜드 오소리 교구 주교의 업무 기록에 아쿠아 비테, 즉 생명의 물을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기록은 증류에 대한 최초의 문헌이지만 와인을 증류한 것이었다. 최초의 위스키 제조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기록은 스코틀랜드에서 나왔다. 1494년 익스 체커 롤스(공공 세입의 징수와 배분을 담당했던 정부 부서 기록)에 “맥아 8볼(ball, 중량 단위)을 존 코어 수도사에게 주니 그것으로 아쿠아 비테를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약 190여 리터의 위스키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마지막 쐐기는 1736년 잉글랜드 장교의 한 서신에서 나왔다. 그는 편지에 'usky는 스코틀랜드의 자랑'이라고 썼다. 마지막에는 스코틀랜드가 미소 지었다. 휴, 그래서 위스키 원조는 어디일까?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whiskee(1753), whiskie(1751), whisky(1746) 단어로 언급됐다. 1753년 <젠틀맨스 매거진>에 위스키(Whiskey)라는 단어로 처음 등장하기도 했다. 통상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위스키를 Whisky로, 아일랜드는 Whiskey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알 수 없다'이다. 다소 허무하지만 실체적 진실에는 아무도 다가서지 못했다. 스코틀랜드인에게는 스코틀랜드가, 아일랜드인에게는 아일랜드가 최초의 위스키를 만든 나라일 터였다. 우리는 그저 과학과 예술의 결합으로 탄생한 '액체에 녹아든 햇빛'을 즐기면 그뿐이다. 괜히 한 편의 손을 들어주어 친구와 적을 동시에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 논쟁에 끼어들 수는 없지만 우리 어깨가 한껏 으쓱해질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조선시대에 위스키가 존재했다는 기록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에는 '섬라(지금의 태국)주'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술의 제조법이 눈길을 끈다. "소주를 2중으로 증류하고 여기에 고귀한 이국의 향료를 넣은 뒤, 향나무 연기가 스며든 병에 넣어 2~3년간 땅에 묻었다가 파내어 쓴다. 술을 담는 병을 준비할 때 단향 나무 가지 10여 근을 태워 옻칠한 것처럼 연기를 쒼 다음에 술을 담는다"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스카치위스키 제조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북방식 증류주인 소주에 비해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술을 즐겼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단향 나무 향기가 은근히 배인 섬라주는 어떤 맛과 향을 지녔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에디슨과 테슬라는 동시대에 살면서 전기(전류)를 발명(견)했다. 그레이엄 벨과 엘리샤 그레이도 거의 동시에 전화기를 생각해 냈다. 전화기를 발명한 업적은 결국 이탈리아 발명가 안토니오 메우치에게 돌아갔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탐구하는 존재임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발효주와 증류기, 그리고 시간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어쩌면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증류주의 탄생은 필연적 일지 몰랐다. 세계 양차 대전을 분기점으로 스카치위스키와 아이리시위스키는 다른 길을 걸었다. 스카치위스키가 세상을 장악했다면 아이리시위스키는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팬데믹 이후 오랜 경쟁자이자 동료인 두 위스키는 부활을 꿈꾼다. 당장 폭증하는 전 세계 수요를 감당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술이 그저 알코올과 물, 그리고 약간의 방향족 화합물로 구성된 액체에 불과했다면 아마도 이렇게까지 열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술 원조 논쟁도 '스토리'다.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우리는 역사의 여명과 자연의 신비, 과학의 위대함을 동시에 들이켠다. 세상에 나쁜 술은 없다.
<참고 자료>
- 위스키 대백과 (데이비드 위셔트)
- 위스키의 지구사 (케빈 R. 코사르)
- 우리술 익스프레스 (탁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