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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Mar 10. 2024

글을 쓰지 못하는 건 OO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글쓰기

지난해 목표 중 하나는 메일 한 편씩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무쓸모의 쓸모>라는 제법 철학적인 타이틀로 야심 차게 시작했더랬습니다. 희망찬 1월을 지나 뭔가 아쉬운 2월의 다리를 건너 만물이 소생하는 3월에 이르기까지는 그럭저럭 해냈습니다. 하루에 한 편, 그것도 일기장이 아니라 공개된 플랫폼에 글을 올린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시간이 많다고 마냥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낼 수 있었던 건 '작심삼일'이란 녀석에게 지기 싫었고, 무엇보다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제 글에 제가 감동하다니, 좀 우습지만 정말 그랬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목표는 흐릿해지고 의지도 시들해졌지만 2023년은 다른 어느 해보다 많은 글을 썼습니다. 매일 한 편씩 쓰지는 못했지만, 분명 글쓰기 근육이 조금은 튼튼해졌을 테지요. 


목표나 결심이 얼마나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킬까요. 저 같은 단순한 인간형에게는 매우 큰 영향을 끼치는 듯합니다. 우선 올해는 바쁘다는 핑계로 '새해 계획'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론 처음 있는 일입니다. 글쓰기도 예전 같지 않아 고작 토요일 연재로 <한뼘소설>을 다시 시작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머릿속으로 다양한 기획을 시도했지만 행동으로 옮긴 건 역시 하나뿐입니다. 글쓰기가 더 이상 즐겁지 않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글쓰기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일까요. 유튜브와 쇼츠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글쓰기는 즐겁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리 부진한 걸까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라는 제목의 서문을 읽는 건 만으로 이미 책값 18,000원이 아깝지 않은 류시화 작가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에서 질문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미사여구 없이도 문장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책, 억지로 감동을 짜내지 않는 담담한 글귀만으로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산문에서 글을 쓰지 못하는 원인을 발견했습니다.  


무엇인가 절실하게 갈구한 모든 순간이 날개였다.

무명작가였던 도스토예프스키를 세계적인 문호로 만든 원동력은 '돈'이었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더욱 글쓰기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단편 소설의 대가 레이먼드 카버도 스무 살에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기에 가족을 부양하는 수단으로 짧은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그래야 빨리 원고료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류시화 작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자유를 얻기 위해, 새로 태어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일(번역과 글쓰기)에 몰두했습니다. 너무나도 절실했기에 쓰고 또 썼습니다. '절벽 끝'에 내몰렸을 때 비로소 날개가 생긴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습니다. 힐끗 뒤 돌아보니 아직 제 등에는 날개가 돋아나 있지 않았습니다. '글쓰기의 즐거움' 너머를 생각할 때가 된 것입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전업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하루키처럼 글 쓰는 일이 조금도 힘들지 않은 작가가 있습니다. '재능' 있는 것이겠지요.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그런 재능은 없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역시 저 같은 사람에게도 절실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취미 정도로 끝내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들에게 삶에 만족하는지 물어보면 다양한 대답이 나옵니다. 통계 자료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절반은 만족하고 나머지 절반은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절벽 끝으로 내몰린 후에 날개가 돋는 통과 의례를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닐 터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날개가 돋은 이들도 있을 테고, 잘 닦인 8차선 도로를 질주하는 스포츠카처럼 탄탄대로를 달리는 이들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습니다.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건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군!'이란 자조 섞인 푸념일 뿐이니까요. 저 역시 그러하니 날개를 달아줄 건 절실함 밖에 없는 듯합니다. 위태위태한 낭떠러지를 조금 거침없이 걸어야겠습니다. 절실함 한 스푼 얹어서요. 무언가를 절실하게 원하는 순간 날개가 돋을 테니까요. 


지금 여러분의 등 뒤에는 날개가 돋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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