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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Apr 10. 2024

이율배밭

한 평 텃밭 일기 

이율배밭(?)이라니, 제목부터 오타가 아닌가 의구심 들 테지요. 네, 오타 맞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두 명제가 동등한 타당성을 가지고 주장된다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원래 의도했던 이 글의 제목이니 말입니다. 아직 철이 덜든 탓인지 뜬금없이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말장난, 좋게 말해 '언어유희' 말입니다. 다양한 욕망이 교차하는 '텃밭'에 관한 글이니 이보다 절묘한 제목은 없겠다 싶습니다. 


매년 삼일절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태극기를 게양하고 한 평 텃밭에 오르는 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겨우내 잠들었던 땅을 뒤집고 한 해 농사를 시작합니다. 올해는 바쁘다는 핑계로 한 달이나 늦게 언 땅을 뒤집었습니다. 이웃 텃밭에 비해 한참이나 늦어져 어디에 뭘 심을지 제대로 고민하지 못했습니다. 몇 해 동안 모아두었던 쌈채소 씨앗을 챙겨 부지런히 한 평 텃밭으로 향합니다. 


한 평 텃밭에 심어봤자 뭘 얼마나 심겠어하실 테지요. 웬걸요. 손바닥만 한 땅덩어리에서도 은근히 많은 걸 길러낼 수 있답니다. 쌈채소와 오이는 이웃과 나눠먹어도 늘 냉장고에 그득하니 말입니다. 올해는 다시 일이 바빠져 욕심을 최대한 덜어내고 쌈채소와 오이에만 집중하리라 마음먹고 우선 쌈채소 씨앗을 심기로 합니다. 오이 모종은 볕이 좀 더 따뜻해야 나오니까요. 


푸성귀들의 쾌적한 성장 환경을 위해서 한 평 텃밭의 밀도는 최대 일곱 줄을 넘기지 않아야 합니다. 뜨거운 여름날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저들도 무척 답답할 테니까요. 15년 텃밭러의 노하우라고나 할까요. 첫째 줄에는 적상추, 둘째 줄에는 청상추, 셋째 줄에는 로메인 상추를 싶습니다. '프로-다이어터'인 아내와 저에게 쌈채소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넷째 줄에는 고급스러운 루꼴라를, 다섯째 줄에는 없으면 섭섭한 청경채, 여섯째 줄에는 영양 만점 쑥갓, 일곱째 줄에는 부드러운 양상추를 심습니다. 


아, 이제 끝났다 싶었는데 소인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판옥선, 아니 씨앗이 들려 있습니다. 청겨자, 치커리, 들깻잎, 오크상추는 어디에 심어야 할까요. 바로 이 순간 두 개의 욕망이 대립합니다. 지금도 충분하니 그만 심으라는 마음과 청겨자의 알싸함과 들깨의 고소함을 포기하지 말라는 마음이 서로 목소리를 높입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첫째 줄과 둘째 줄, 셋째 줄과 넷째 줄 사이에 청겨자와 들깨와 오크상추를 심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탐욕 승리!

더욱이 한 평 텃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오이는 심을 자리도 없습니다. 탐욕에 눈먼 텃밭러의 한 평 텃밭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저 빡빡한 공간을 쪼개고 쪼개 오이 모종을, 고추 모종을, 그리고 토마토 모종을 심으리라는 것을요. 그러므로 이율배밭은 한 평 텃밭의 다른 이름입니다. 


일말의 가책을 느끼며 돌아서는데 늘 보아오던 풍경이 유난히 거슬립니다. 이웃 텃밭에 둘러진 울타리가 원인입니다. 텃밭을 제 집 드나들 듯 침범하는 고라니는 언제나 골칫덩어리입니다. 이웃 텃밭러들이 내놓은 해결책이 바로 울타리입니다. '고라니 배추'라는 글에서 고백한 것처럼 저들의 보금자리를 빼앗은 원죄로 우리 집 한 평 텃밭만큼은 울타리를 치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사방팔방으로 드리워진 울타리 때문에 결과적으로 한 평 텃밭도 울타리를 친 것과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입구는 개방되었습니다만, 녹색 울타리가 참 보기 싫었습니다. 거창하게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탐욕에 눈먼 양심이 원망할 대상을 찾으려는 의도도 없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율배밭이라는 이름을 참 잘 지었다 싶습니다.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화신인가 봅니다.  

쌈채소 씨앗을 뿌리며 한 평 텃밭은 봄을 맞이했습니다. 팍팍한 우리네 삶에도 새봄이 얼른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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