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내를 사랑합니다.
지루한 장마 밑 아내가 입맛을 잃었습니다. 사실 며칠 전 치른 생활체육지도사 수영 실기 시험에서 0.08초 차이로 떨어진 게 원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0.8초도 아니고 0.08초로 떨어지다니 저라도 입맛이 없어지겠다 싶었습니다. 한창 실기 시험을 준비할 때도 사실 아내는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0.1초라도 기록을 단축해야 하니 잘 먹는 게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입맛이 없어도, 먹기 싫어도 단백질을 보충해야 했습니다. 그나마 먹을만하다던 참치와 스테이크를 부지런히 사다 날랐습니다. 요리에는 영 재능 없지만 잘 손질된 고기를 굽는 정도야 못 할리 없을 테지요. 포장지만 뜯으면 끝나는 참치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갑은 점점 홀쭉해졌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 정도는 해야지 싶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성이 부족했나 봅니다. 한창나이도 아닌데 어려운 시험을 준비하는 아내에게 다소 무심했던 게 마음 쓰였습니다. '너도 일하느라 바빴잖아!'라고 가슴 한편에서 소리쳤습니다. '네가 신경 썼으면 0.08초 정도는 충분히 단축시켰을 거야!' 이런 속삭임도 들렸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쳐봤자 무슨 소용 있어 싶었지만, 다음 소라도 잃지 않으려면 빈 외양간이라도 손봐두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때 마침 아내가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 '서진이네 2 아이슬란드 편'이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메인 요리가 '꼬리곰탕'이었습니다. 투덜거려도 언제나 해야 하는 일은 제대로 해내는, 그렇지만 요리엔 재능 없는 이서진 씨가 그 어렵다는 꼬리곰탕을 끓이다니,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디에선지 객기가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었습니다.
"꼬리곰탕 좋아해?" 아내에게 물어보니 "없어서 못 먹지." 합니다. "그럼, 꼬리곰탕 도전해 볼까? 이서진도 하는데." 했더니 "나야 좋지만, 힘들어. 요리도 못하면서 더운데 괜히 일 만들지 마. 치우려면 힘들어." 은근한 돌려까기로 면박 주는 아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서진도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어!'라는 오기가 전투력을 고취시킵니다. "좋아, 내가 맛있는 꼬리곰탕 끓여줄게, 나 말리자 마!"
라면이나 겨우 끓일 줄 아는 요리 똥손의 꼬리곰탕을 향한 여정은 이렇게 호기롭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날 동네 정육점을 찾았습니다. 한우꼬리 정말 비싸더군요. 5만 원이나 하는데 소꼬리가 아니라 쥐꼬리를 주는 것 같습니다. 뽀얀 국물을 우려내기 위해서는 사골을 함께 넣어야 한다는 사장님 조언을 듣고 한우사골도 함께 장만했습니다. 씹는 맛도 있어야지 싶어 양지살 한 덩어리도 추가했습니다. 거금 12만 원을 치렀습니다. 동네 식당에서 꼬리곰탕 한 그릇에 2만 원 정도 하는데 과연 제가 여섯 그릇 이상을 만들 수 있을지 걱정되었습니다. '큰소리치고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지!' 이미 돌이킬 수 없으니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아오는 다리를 끊는 심정으로 "영수증 안 주셔도 돼요." 하며 정육점을 나섰습니다. 구름 위를 걷는 듯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습니다.
서진이네 2를 다시 보기로 2번이나 시청했습니다. 별 거 아니네 싶었는데 정작 요리를 시작하려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네이버에 '서진이네 2 꼬리곰탕'을 검색했더니 벌써 요리법이 수십 개나 올라와 있습니다. 블로그를 하나하나 정독했습니다. 확실히 이서진 씨 레시피는 일반적인 꼬리곰탕 만드는 법에 비해 간단했습니다. 꼬리 살 때 정육점 사장님의 조언을 듣기도 했는데 국물을 세 번에 나눠 우려내야 한다는 말은 이 날씨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일단 서진이네 2 레시피를 최대한 따르기로 했습니다.
1) 3시간 동안 핏물 빼기 : 30분 간격으로 깨끗한 물로 갈아주기 (어느 블로그에서는 10시간 동안 핏물을 빼야 한다고 했는데, 정육점 사장님은 아무리 그래도 핏물이 완전히 빠지는 건 아니니 차라리 첫 번째 삶은 물을 버리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덜 힘들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고요.)
2) 초벌 삶기 : 약 20~30분 정도 삶기. 한 블로그에서 이때 소주를 150ml 정도 부어주면 잡내를 제거할 수 있다고 했는데 집에 소주가 없어 위스키를 부어주었습니다. 단가 상승!!! 어느 블로그에서는 5분 정도만 데치면 된다고 했는데 사골과 함께 핏물을 뺀다는 생각으로 좀 오래 삶았습니다.
3) 삶은 소꼬리 흐르는 물에 하나하나 씻고 가위로 기름 제거 : 방송에선 이 작업에 품이 많이 들지만 쥐꼬리만 한 소꼬리라 별로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양지살은 이때 꺼내 먹기 좋게 잘라두었습니다.
4) 국물 우려내기 (약 3시간 정도)
- 1시간은 뚜껑을 열고 강불에서 끓이고, 이때 떠오르는 기름기를 국자로 제거합니다.
- 2시간은 뚜껑 덮고 중불에서 끓이되 중간중간 뚜껑을 열어 떠오르는 기름기를 제거합니다.
- 마지막 30분에 잘라 놓은 양지살 추가
- 일부 블로그와 정육점 사장님은 이 과정을 세 번 반복해 국물을 우려내라고 했습니다. 이건 포기!
5)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하기
정오에 시작한 꼬리곰탕 끓이기는 6시를 훌쩍 넘겨 겨우 끝이 났습니다. 다른 건 그다지 힘들지 않은데 역시 펄펄 끓는 커다란 냄비 옆에 서서 떠오르는 기름기를 제거해야 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초벌 삶기한 냄비는 기름기가 많아 설거지하기에 조금 까다로웠고요.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단 어렵지 않아 '나 요리에 소질 있는 거 아냐.' 허튼 상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꼬리곰탕 맛은 어땠을까요? 솔직히 '짜잔'하고 냄비 뚜껑을 열었을 때 기대했던 것보다 국물이 뽀얗게 우려 나지 않아 실패한 게 아닐까 걱정되었습니다. 식당에서 먹는 곰탕이 오죽 우유처럼 뽀얗던지요. 제가 끓인 곰탕은 소고깃국과 곰탕의 중간 정도 빛깔이었습니다. 맛도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건강한 맛이긴 한데 뭔가 부족한 느낌적인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한동안 '인스타그램'에 등장한 요리를 열심히 따라 하던 아내가 요즘은 왜 뜸해졌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서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 12만 원 날렸구나!
밤늦게 퇴근한 아내가 국그릇에 꼬리곰탕을 한가득 담았습니다. 대파와 후추를 더하고, 사비니 타르투피 트러플 소금으로 간해 맛있게 한 그릇 비워냈습니다. "웬일이야, 맛있네, 곰탕!" 뜻밖의 칭찬 한 마디에 장장 일곱 시간 동안 쌓인 피로가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맛있어?"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날 제가 만든 곰탕을 먹지 않았습니다. 아니 먹지 못했습니다. 요리하는 내내 맛을 봤던 게 원인이었습니다. 그래도 12만 원을 날리지 않아서, 태어나 처음 만든 꼬리곰탕이 먹을 만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근래 들어 가장 심하게 코골이를 했다고 아내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꼬리곰탕은 일곱 그릇 정도 나왔습니다. 2만원 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