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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Sep 08. 2024

글을 쓰지 못한 변명과 다시 글을 쓰는 까닭

<삼체 3부작>과 차인표

브런치팀의 회초리가 도착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바로 그 '경고' 메시지말입니다. 올 때가 됐지 싶었는데 기어코 오고야 말았습니다. 마음 단단히 준비한 매라서 그랬는지 그다지 따끔하지는 않았습니다. 혼쭐 날 줄 알았습니다. 


슬럼프였습니다. 


써야 할 글이 없었습니다.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영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제나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동안은 쓰고 싶은 글이 없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입니다. 기후위기가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협하지만, 여전히 뜨거워지는 지구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나의' 먹고사는 문제는 세상의 모든 심각한 문제를 다 덮을 만큼 중합니다. 마음에 커다란 바위가 떡하니 앉아있으니 덩달아 머릿속에도, 마음속에도 글자 하나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바쁘기도 바빴습니다만, 바쁘다는 건 정말 핑계입니다. '우리'가 언제 바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요. 책상에 앉아 쇼츠나 유튜브를 볼 시간은 있어도 글 쓸 짬은 없다니 이토록 염치없는 핑계가 어디 있을까요. 그래도 바빴습니다.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고 주말에도 일했습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 글을 쓰던 열정이 '먹고살기즘'과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집단 몽유병'에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여기에 더해 글을 쓰지 못한 가장 중요한 까닭은 바로 <삼체 3부작>을 완독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는 삼체 3부작이 제 창작 열정을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습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위스키 관련 책을 두 권 연달아 읽고 킬링 타임용 가벼운 소설을 읽어야지 마음먹었습니다. 마침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 <삼체>를 재미있게 본 터라 자연스레 원작 소설에 손이 갔습니다. 사건의 지평선이 폭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SF 소설 <지구연대기>를 쓴 나름 SF 작가로 삼체 3부작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이었습니다. 자칫 어려운 과학(우주) 이야기를 어쩌면 이토록 시종일관 흥미롭게 풀어냈는지 도저히 소설에서 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다소 난해한 부분이나 지루한 장면이 전혀 없던 건 아니지만, 2천 페이지(1부 삼체문제 452쪽, 2부 암흑의 숲 716쪽, 3부 사신의 영생 804쪽)에 달하는 장편이 읽는 내내 재미있을 수 있다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습니다. 문제는 작품을 읽는 동안의 감동이 창작 욕구를 깡그리 소멸시켜 버렸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우주과학, 물리학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낸 SF 소설이 눈앞에 있는데 무슨 글을 쓰겠다고 설레발칠 수 있을까요. 절망의 벽 앞에서 혼이 쏙 빠진 채로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 쓰지 않아도 잘 살아졌습니다. 이참에 브런치를 정리할까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다시 글을 써야지 마음먹게 된 것도 소설 때문이었습니다. 차인표 작가의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덕분입니다. 정확히는 차인표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덕분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리고 여전히 셀럽의 삶을 사는 배우 차인표가 소설을 써야지 결심한 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소설에서라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사실조차 외면받는 이 시대에 작가는 글을 써야 하는 까닭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나'라도 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후대에 알리고 싶다고…. 딱히 좋아하는 배우도 아니고, 소설가가 되었다는 사실도 한 귀로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유퀴즈에 나온 그를 본 순간, 울컥하는 걸 억지로 참아야 했습니다. "차인표 진짜 멋있는 사람이야. 예전부터 느꼈는데 오늘 보니 더 그렇네." 연신 감탄하는 아내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글을 써야지 마음먹었습니다. 


누가 그에게, 혹은 저에게 그토록 막중한 소임을 맡기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당장 역사적 사실을 소설로 기록하겠다는 책임감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실 일부를 기록해 내일로, 미래로 전달해야겠다는 마음뿐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결코 뒤로 가지 않는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요즘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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