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쇼츠와 유튜브의 늪에서 조금이나마 헤어날 요량으로 다시 책을 읽어야지 마음먹었습니다. '절필'의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던 문제작 <삼체> 이후 독서와 내외하던 터였습니다. 마음 고쳐 먹고 꾸준히 글을 써야지 다짐했지만, 브런치 하얀 화면을 띄워 놓고 유튜브와 쇼츠 알고리즘에 농락당한 게 하루이틀이 아니었습니다. 책을 읽지 않으니 '글감'도, '영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건우야, 미안해! X 세대는 어쩔 수 없나 봐!" 첫사랑보다도 책이 더 그리웠습니다(이 표현은 왠지 후환이 생길 것 같다는…).
책을 향한 애정이나 관심이 따라둔지 한 시간이나 지난 온 더락 위스키처럼 묽어진 터라 서점에 들러도 선뜻 읽고 싶은 책을 고르지 못했습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 닥칠 때면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의 도움을 받곤 했지만, 왠지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였더라?' 머릿속으로 질문해 보니 자연스레 무라카미 하루키와 레이먼드 챈들러가 떠올랐습니다. '衣莫若新, 人莫若故(옷은 새것이 좋고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말해도 두 작가 작품은 거의 읽은 터라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결국….
두 작가의 초기작을 읽기로 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가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신간이 나오길 목 빼고 기다렸습니다. 언제부턴가 그런 하루키가 시들해졌습니다. 신간이 나와도 시큰둥했지요. 결국 읽기는 했습니다만. 그래서인지 첫 소설로 돌아가 보자 싶었나 봅니다.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챈들러 단편집 <밀고자 외 8편>을 골랐습니다. 아직 <기나긴 이별>이나 <빅 슬립>을 읽지 않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짧은 소설입니다. 반나절이면 다 읽습니다. 이런 단순한 이유로 먼저 손이 갔습니다. '엥? 이런 내용이었다고?' X 싸고 뒤처리하지 않은 것처럼 중간에 이야기가 뚝 끊겼습니다. '이게 소설이면 나도 쓰겠다.'라고 작가 후기에서 스스로 밝힐 만큼 발표 당시 이 작품은 일본 소설계에 제법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겐 이후에 나올 '하루키만의 느낌적인 느낌'이 곳곳에서 풍겨져 무척 신선했습니다. 예전에 읽었는데 마치 처음 읽는 양 즐겁게 읽었습니다. 조금 어설퍼도 이게 하루키지 하면서요.
게다가 요즘 글쓰기로 애를 먹고 있는 저에게 흥미로운 팁을 발견하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첫 문장부터 마음에 들었습니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완벽한 문장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데 저 같은 풋내기 작가들은, 작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문장 하나에도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요. 동시에 역시 작가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생각하는 바를 적확하게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엿볼 수 있는 문장도 연이어 나옵니다. "정직하게 얘기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정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정확한 언어는 어둠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버린다."라고 말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면 원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문장이 될 때가 많습니다. 저만 그런 건 아니겠죠. 그럴 때마다 아무나 글 쓰는 거 아니구나 체념하게 되곤 합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사과는 맛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은데 문장으로 옮기다 보면 '애플의 스마트폰'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게 되는 꼴입니다. 이런 어려움에 대해 '작가의 말'에서 하루키도 꼬집어 이야기했습니다. 정직하게 쓰려고 하면 할수록 정직하지 않은 문장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요. 하루키가 스스로 내린 해결책은 '심플하게 쓰기'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쓰지 않았을 정도로 심플하게 말이죠. 심플한 언어를 쌓아, 심플한 문장을 만들고, 심플한 문장을 쌓아, 결과적으로 심플하지 않은 현실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탄생했습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과연 이 작품이 소설인지 논란이 되었지만, 결국 하루키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만의 문체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소설가가 되었지요.
'가능한 한 문장을 심플하게 하기' 하루키의 글쓰기 비법에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저만의 방법을 더해야겠지만요.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여전히 글쓰기는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불빛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서 길잡이가 되어 줄 별 하나를 발견한 기분입니다. 써야지요. 쓰는 사람이 작가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책을 읽는다는 게 이렇게 이롭습니다. 이렇게 좋은 책을 읽지 않을 이유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고마워요, 하루키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