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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 후폭풍

거절은 다 힘들다

by 최현숙

2월 27일에 17년을 몸담은 회사에서 정리해고 통지를 받은 지 어느덧 두 달 반이 흘렀다. 4월 29일에 회사와 고용관계가 공적으로 끝났고 나는 자유인으로 남았다. 적잖은 퇴직금이 들어왔지만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안감엔 장사가 없다.


지난 일 년 동안 지독한 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매일 새벽같이 무거운 마음을 부여잡고 일어나, 어떻게든 하루를 견뎌보려고 했다. 왜 그렇게 힘들어한 걸까? 내가 부족해서일까? 지나치게 내 능력과 지식에 인색한 나는 내 마음에 자꾸 상처를 남겼던 것 같다. 지금도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아무리 곱씹어도 선명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회사의 잦은 구조조정, 정치적 갈등, 제품에 대한 방향 부제, 이런 거시적인 상황들이 내 스트레스의 요인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상황을 주체적으로 바라보고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면 이 더러운 패배감, 피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냥 덮었다. 이렇게 쉴 수 있다는 것에,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음에 감사해하고, 지금 당장 내 앞에 벌어진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해답을 찾을 수 없다면 시기가 아닌가 보다. 앞만 바라보자. 퇴직을 하기엔 아직 토끼 같은 아들이 있으니 앞으로 10년은 족히 더 일을 해야 한다.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그동안 내가 했던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여기저기 많이도 옮겨 다녔고, 다양한 부서와 사람들과 협업을 했고, 그중엔 어깨가 으쓱거릴 만한 일들도 있었다. 반면에, 뭔가 열심히 한 것 같긴 한데, 보여줄 게 전혀 없던 시기도 있었다.


AI와 정리해고로 인해 하이테크 고용시장이 얼어 있다고 하지만, LinkedIn에는 끊임없이 취업 기회 포스팅이 올라온다. LinkedIn은 미국 직장인들이 주로 쓰는 취업 관련 소셜 미디어 플랫폼이다. Microsoft에서 인수를 했지만, 워낙에 브랜드 인지도가 높고, 영향력이 커서 독자적으로 운영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요즘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LinkedIn을 들여다본다. 지원할 만한 자리가 있나? 내가 아는 사람들, 근황은 어떤가? 요즘 취업시장 트렌드는 어떤가?


주변에서 다들 시간이 걸릴 테니 서두르지 말고 쉬엄쉬엄해보라고 했다. 내 이력서에 대한 반응을 알고 싶었고 일단, 몇 개의 원서를 내보았다. 고스란히 거절 이멜들이 날아왔다. 그러던 와중, 친구의 소개로 네트워킹 모임에 가게 되었다. 40-50대에 테크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격려하고 도움을 주는 게 취지였다. 오래간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나가 새로운 사람들과 와인 한잔을 하려니, 처음 미국에서 일을 시작할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그때는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서 일을 한다는 자체가 신이 났다. 출근을 하기 전에도 회사 건물 주변을 걸어 다니며 이게 현실인가 나를 꼬집어 보던 기억. 그 이후에 벌써 20년의 세월이 흐르다니...


처음에 서먹서먹했던 분위기는 온 데 간 데 없고, 술 한잔씩들을 하니 어느덧 왁자지껄, 푸하하.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각자의 LinkedIn 프로파일을 공유했다. 그렇게 연결이 되고, 앞으로 기회가 되면 서로를 지원해 주겠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담겨있다. 요즘은 회사 밖 직장인들과도 주로 소셜미디어로 연락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LinkedIn을 통해 이루어진다.


한 스타트업에서 UX를 책임지고 있는 예쁘장한 일본인 친구가, 자기네 회사에서 PM을 뽑는다며 내게 지원하겠느냐고 물었다. 고속도로에서 물류를 책임져 주시는 트럭 운전사들의 경험을 디지털화하는 회사였는데, 트럭 운전사라는 아주 구체적인 타깃이 있어서 적잖이 맘에 들었다. 자기가 리쿠르터에게 얘기할 테니, 당장 원서를 내라고 했다. 아... 네트워킹이 이런 거구나.


그 네트워킹 미팅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아서인지, 그다음 날부터 원서를 몇 개 더 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몇몇 회사 리쿠르터들에게 연락도 오기 시작했다. 내 LinkedIn 프로파일에 "Open to Work"이라는 태그를 달았고 리쿠르터들만 볼 수 있게 설정을 했는데, 그 때문인지 갑자기 일주일 안에 세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리쿠르터의 관심을 받는 게 초반에 큰 관건이기도 한데, 이게 웬 떡이냐! 나름 인지도가 높은 회사들에게서 연락이 와서 기분이 째졌다. 이렇게 해서 내 구겨진 자존심, 회복되려나?


지난 몇 주 사이에 6번의 인터뷰를 보았다. 갈대 같은 내 마음을 어찌하면 좋으리오. 전혀 관심도 없었던 회사였는데, 면접을 준비하면서 내 마음은 부풀어갔다. 그렇게 삼삼하게 몇 주를 보냈는데, 오늘 한 회사에서 다음 단계로 통과하지 못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거들먹거리며 복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떨어졌다는 소식에 확 의기소침해졌다.


거절은 다 싫다. 정리해고도 싫고, 시험에 떨어져도 싫고, 면접에 떨어져도 싫고, 애인에게 차이는 것도 싫다. 내가 주도하지 못하고 당하는 상태, 이런 과정을 앞으로 계속 거쳐야 한다. 그러다 보면, 거절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지려나? 그래도 거절당할 때마다 느끼는 고통은 남아있을 것 같다. 그저, 너무 고통스럽지 않게 넘겨 버릴 수 있는 맷집이 쌓이겠지.


그래도 아직 몇 개 회사들에 기대를 걸어본다. 이 중에서 취직을 할 수 있으면 대박이고, 아니면 또 근육 연습하는 거고. 내 커리어의 다음은 어디에 있을까? 언제쯤 찾아올까?


어제는 코스코에서 내 개인 컴퓨터를 장만했다. 거의 15년 만에 사는 나만의 컴퓨터. 아빠가 미국에 올 때 4백만 원짜리 Thinkpad 컴퓨터를 사주셨는데, 그보다 족히 100배는 향상된 컴퓨터가 고작 천불. 그동안 회사 컴퓨터에 내 인생의 모든 기록이 담겨 있었다. 후회막급했다. 같은 회사에 너무 오래 다닌 탓인지, 나만의 영역과 회사 사이, 그 간극이 희미해졌다. 회사 IT와 보안팀과 끝까지 싸워서, 내 자료들을 복구했다. 유권이 어릴 적 사진들, 내 세금보고 기록, 이민 관련 서류, 내 인생의 정점을 기록해 주는 증거들이 고스란히 회사 네트워크 안에 잠겨있었다. 다행히 자료는 복구가 되었고, 오늘 새 컴퓨터에 내 자료들을 복사했다. 새 컴퓨터가 집들이를 했다. 나만의 세상이 열린다. 거절에 대한 근육이 붙고, 예전 회사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사라질 즈음, 난 또 어디엔가 속해 있겠지.


나에게 친절하자. 나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지 말자. 남들에게 휘둘리지 말자, 다짐하며 기대해 본다. 또 꿈을 꾸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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