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기웃거리는 이유
인간이 영적인 존재 (spiritual being)라는 관점은 생소하지 않다. 생활 속에서의 영적 경험을 넘어,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존재이며 그 영성이야 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이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와 우주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신이 존재하는가? 내 생활의 작은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소명이란 존재하는가? 내가 성장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내 인생의 궁극점은 어디인가? 요즘 시간이 많아서인지 이런 뜬구름 잡는 질문들이 샘솟는다.
정리해고 이후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선교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버클리에 있는 교회였는데, 목요일 저녁 공짜로 밥을 준다고 했다. 여럿이 모여, 게다가 남이 해준 밥을 먹으며 영적인 대화를 나눈다니 솔깃했다. 영국의 한 교수가 비신자들에게 기독교와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Alpha라는 프로그램을 기획제작했는데, 이 교회에서 올해 처음으로 도입한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3월 둘째 주, 교회에 도착하니 한 5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 키가 크고 꽝 마르신 목사님이 편안하게 사람들을 맞이해 주셨고 저녁을 먹으며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통성명을 했다. 우연히 우리 테이블은 백인 여성 한 명을 빼고는 다 아시아인들이었다. 테이블의 호스트는 성격이 좋아 보이는 중년의 가장으로 한국인이었고 한 9명 정도가 모였다. 비신도들, 자신의 영성을 고양시키고 싶은 사람들, 교회 관계자들, 참여한 이유는 달라도 다들 기독교와 서로에 대한 호기심은 비슷했다.
밥을 다 먹을 때쯤, 목사님은 분위기를 풀어주시느라 농담을 던지시고는 바로 Alpha 프로그램에서 준비한 30분 정도의 비디오를 틀어주셨다.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가 주제였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가교의 역할을 하러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가 부활하여 하늘로 돌아가셨다는 성경적인 기록이 왜 사실인지 설명했다. 그 영국 교수는 예수님의 말씀이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파급되어 갔다는 사건에 집중했다. 미디어라고는 필서밖에 가능하지 못했던 시기에 그 파급속도는 전무후무한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예수님의 존재와 성경의 기록이 진실이라 역설했다.
다 같이 그 비디오를 보고 나서, 테이블의 호스트는 질문을 던지며 토론을 유도했다.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오는 자유함에 모두들 자신의 생각을 편안하게 나눴다. 이래라저래라 반박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으며 그냥 서로를 듣고 이해하는 선에서 토론이 진행되었다. 끝나고 집에 오는데 또 오고 싶어졌다. 기독교인들은 늘 나누고 싶어 한다. 예수님의 말씀도, 밥을 먹이는 것도, 서로를 위한 기도를 나누는 데도 넉넉하다. 게다가 종교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근본적인 주제를 다른 사람과 편안하게 공유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내가 유권이와 다니는 한국교회에서도 나는 교회에 다니는 이유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하는 편이다. 기독교인이라서가 아니라, 아들에게 따뜻한 커뮤니티가 필요했고, 외로웠고, 한국말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가 필요했다고. 한국 교회에서 소모임을 할 때면, 늘 답답한 마음이 생기곤 했다. 토론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마음가짐과 생활태도에 대한 주제가 많은데, 나도 모르게 신자와 비신자의 선을 그어버리는 통에, 자유로운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Alpha 프로그램에서는 비 기독교인으로서 내 생각을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고 내가 오롯이 수용되는 느낌이 들었다. 비신자라는 입장이 나 혼자가 아니어서였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두세 명은 되었다.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5월 초 주말에는 Alpha 프로그램 리트리트가 있었다. 서너 개의 Alpha 비디오를 보고 토론하고, 찬양을 하고, 준비해 주신 맛난 음식을 먹었다. 저녁 시간에는 별도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 목사님과, 우리 테이블 호스트, 교회 관계자 한분이 오셔서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셨다. 조명은 어둑하고, 기타와 어우러진 라이브 찬양음악이 깔리고, 내 마음은 유권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말랑말랑한 유권이가 겪고 있는 몇 가지 기도 제목들로 내 마음은 울먹거렸다. 이 분들의 기도를 들으며 내 얼굴은 더욱 젖어갔고, 그때 느꼈던 마음의 울림이 아직도 남아있다. 내 마음의 열쇠가 열리고 사람들의 기도에 감동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했을까? 다음날 누구는 그렇게 말했지만 차분하고 정갈해진 내 마음 상태가 신기할 뿐이었다.
얼마 전에는 LinkedIn에서 우연히 예전 직장 동료와 다시 연결이 되었다. 필리핀 사람으로 40대 초반의 까무잡잡한 피부에, 검고 긴 생머리를 가진 포카혼타스를 연상시키는 친구였다. User Experience Manager로 일을 했던 친구인데, 한 5년 사이에 테크업계를 떠나 요가와 명상 선생님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산타크루즈라는 동네에서 요가수업, 명상 리트리트, 에너지 힐링, 별자리 읽기 등 다양한 사업 콘텐츠를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직업을 바꾸는 사람들을 꽤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180도 전환한 친구는 많지 않다.
그러면서 이 친구는 우리가 다시 연결된 데에는 분명히 우주의 뜻이 있을 것이라 했다. 기독교이든 아니든, 그녀는 물질의 세계를 넘어서는 큰 동력이 있다고 믿고 그걸 신, 에너지, 우주 등으로 표현했다. 그녀의 확신에 찬 모습에 적잖이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두려워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마주해 나가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자신의 에너지 힐링 워크숍을 추천했다. 인생의 전환기에 큰 도움이 될 거라며 성심껏 제안하는데, 상술이 아닐까 하다가도 혹시나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지난 주말에는 산호세에 사는 친구와 시간을 같이 보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마음 다스리기를 위해 명상센터에 정기적으로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 마린 카운티에 있는 명상센터에서 반나절 정도의 워크숍에 참여했는데, 끝나고 나니 마음이 한결 정화되어 가벼운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감동받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하면 내 틀을 깨 가면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창의적으로 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늘 무언가를 꿈꾸며 계획하고 실행하며 사는 것 같다. 여행도, 요가도, 명상도, 종교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일상의 표면에서 벗어나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추구하고, 생각의 틀을 깨며 새로운 관점을 갈구하고, 대자연의 신비를 경험하며 물질의 본질과 원칙에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에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
내 눈에 보이는 세계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물질의 세계에서만 존재하지만, 내 일상을 초월해 미지의 세계를 경험할 때 우리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견뎌낼 힘을 얻게 된다. 그러한 경험이 반복될 때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Alpha 워크숍에서 목사님은 내게 말했다. 무조건 믿지 않고, 따져보고 자신의 생각과 씨름하는 과정을 거쳐야 제대로 하느님과 만날 수 있다고. 누구는 하느님은 이미 날 선택하셨고, 나는 그가 닦은 길을 걸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영적인 여정 어딘가에 머물러 있음에 틀림없다. 그게 예술이던, 명상이던, 기독교이던, 나의 여정에 도움을 주는 이들에게 감사하다. 그들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생각의 지평을 열어간다. 내가 아직도 교회에 기웃거리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