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감상 후기…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매년 작가 4인(팀)을 선정해 전시를 하곤 하는데요
그냥 연례행사처럼 들려서 훑어보고 오면 왠지 모르게 교양도 쌓이고 어깨도 으쓱해지는 기분이라 좋습니다
하지만 문화생활과는 별개로 전시 자체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근데 원래 저는 전시를 보고 막 감명을 받기보다는,,
아뉜데 나는 저렇게 생각 안하는데? 라는 반발심만 가득 차서 돌아오곤 하는 스타일입니다..
물론 제가 이렇다 저렇다 할 수조차도 없는 엄청난 분들의 전시이지만.. 그냥 개인 취향이 아닌 걸로..
아무튼 2025 전시도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올해의 작가상에 선정된 이유를 깨닫곤 합니다..
i. 김영은 [청취의 정치]
이 전시는 '청취'라는 행위와 감각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소리박물관이나 사운드 전시는 이미 존재하지만, 이 전시는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행위로서의 '청취'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권력이나 이데로기적 실천을 탐구한다. 보통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작동을 떠올리면, 선전물 배포나 행동반경의 제한처럼 시각적 자극이나 규율적 행위를 통해 형성되는 헤게모니만을 상상하기 쉬운데, 청각과 청취 그 자체의 작용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라 매우 인상 깊었다.
특히 <붉은 소음의 방문>에서 라디오와 사이렌이 남북의 청취자에게 작용하는 지배적 감각에 다루는 지점은, 분단국에 사는 시민으로서 자연스레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남북 이슈 관련해 대북방송이나 라디오 선전의 사례를 떠올리면, '청취의 정치'라는 전시의 테마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아일랜드 이주 여성들의 소리를 수집해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형태를 전수하는 장(field)로 재구성한 작업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청취, 즉 감각의 정치가 공포, 혐오, 소외뿐 아니라 회복, 연대, 저항의 가능성에까지 닿는다고 설명한다.
사실 전시 직후에는, 감각의 정치가 회복, 연대, 저항으로 지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남북 관련 작품은 배경지식이 있어 공감이 되었지만, 아일랜드 이주 여성과 같은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경험에 대해서는 체감적 이해가 부족해, 그것이 어떻게 연대와 공감으로 연결되는지 전시만으로는 충분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마침 오후에 밴드 공연을 보러 갔고, 그 자리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펑크나 락, 힙합은 대표적인 하위문화 장르이다. 이 장르들은 기존의 기득권 혹은 자본 세력에 저항하며, 자신들만의 독자적 색채를 만들어 간다. 세상은 여전히 주류 문화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비주류 문화 또한 자본의 힘 없이는 존속하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하위문화는 특정 계층이나 공동체의 바깥에 서 있는 이들에게 강한 힘이 된다. 홍대 어딘가 먼지 가득 지하 공연장에서, 관객 서너 명 앞에서 노래를 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누군가에게 삶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가 말하는 '청취' 역시 무엇을, 어떤 위치에서 청취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지배 작용을 만들어 내며, 때로는 연대와 저항, 그리고 회복을 이끌어 내는 효과적인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청각을 통해, '청취'라는 행위가 제도와 규범, 권력관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게 만든다.
ii. 임영주 [믿음의 빈 곳을 채우는 서사]
이 전시는 '믿음'이라는 개념을 전통적 미신, 유사과학, 종말론과 접목해, 그것이 현대의 과학 기술과 만나는 지점을 탐구하는 작업으로 보였다. 작가는 신념과 믿음이 전통적 혹은 현대적 기술과 연결될 때 발생하는 흔들림과 균열에 주목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나 문제의식에 대해 개인적으로 회의적인 입장이어서, 올해의 작가상 전시 네 개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전시였다. 다만 관람 경험만 놓고 보자면, 네 전시 중 가장 좋았다. 대형 스크린을 바닥에 누워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한 점, 곳곳에 체험형 전시가 마련되어 있었던 점이 인상적이었다.
작가의 인터뷰 영상 중, 대형 스크린 영상을 분할해 전시장 사방에 배치하여 "눈이 앞으로 두 개 달린 인간은 결국 이 비디오를 절대로 한 번에 볼 수 없다"라고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에서 어떤 생태학적 의미나 환경적 함의를 떠올리기도 했지만, 작품의 본질이 사후 세계, 즉 죽음과 그 이후 세계라는 점에서 작품이 본질이 사후 세계, 즉 죽음과 그 이후 세계에 맞춰져 있어, 내가 읽어내고자 했던 의미는 다소 흐려졌다. 나는 죽음과 사후 세계, 더불어 미신과 유사과학이 과학적 이론의 영역이라기보다, 종교와 예술처럼 '믿음'에 기반한 지극히 주관적이고도 추상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전시가 철학적이고 미학적 차원을 강조하는 작업으로는 이해되었으나, 오히려 그러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는 깊이 와닿지 않았다.
결국 이 전시에서 말하는 '믿음'을 공유하거나 공감하지 못한 나에게는 다소 허무하게 다가왔다. 과학적 객관성과 신앙적 차원이 중첩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VR이나 인공지능과 같은 최신 기술을 통해 '믿음의 영역'으로 시각화한 작업으로 보였고, 미술관 환경에 어울리는 미적, 예술적 완성도는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사회적 현상이나 이데올로기적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측면에서는, 다른 전시에 비해 다소 빈약하다고 느껴진다.
iii. 김지평 ['없는' 전통으로 다시 쓰는 미술사]
동양화를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작가가, 오히려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요소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관점의 전시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흥미로워다. 전통적 소품이자 현재도 제사나 사극에서 사용되는 '병풍'을 현대적으로 읽어내어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병풍 속 그림의 이야기가 전통적 서사의 중심이 되는 주체가 아니라, 그 외곽에 위치해 사라져 온 여성, 노인 등의 존재를 중심으로 다시 그려지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서사가 생성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특히 '병풍'이라는 한국 혹은 조선적 색채가 강한 소품을 현대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기존의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보다도 '전통성'을 기반으로 한 급진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작가는 이어한 빈자리, 즉 사라진 존재들에 대한 그림을 '재야의 미술'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재야의 미술의 주체가 주목받아 다시 중심에 서게 되면, 또 다른 객체가 주체가 되어 그 빈자리에서 새로운 서사의 발상을 끌어낸다는 사고가 매우 인상 깊었다.
다만, <코즈믹 터틀>이라는 작품은 이 전시의 전체적인 테마와의 연결 지점이 다소 약하게 느껴졌다. 서해안에서 비닐로 포장된 삐라를 잔뜩 먹은 채 발견된 죽은 바다거북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전통성'의 재해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에는 '삐라'라는 이념적 갈등의 맥락과 '바다거북의 죽음'이라는 환경적 문제 사이에서 시대감각이 모호해 보였다 거북이의 이야기를 고대 동아시아 거북 신화에 연결 지어, 생태적 위기 상황을 우주적 시간의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것을 의도로 보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설정이 전시의 주요 테마오는 일정 부분 거리를 만들어 내며, 결과적으로 연결성이 느슨하게 설계된 작품처럼 다가왔다.
iv. 언메이크랩 [인간을 비추는 기계의 눈]
설명에 따르면, 이 전시에서는 '데이터셋팅'이라는 데이터셋을 구축하고, 여기에 감각적 균열을 주입해 일종의 문화적 도구로 전유하고자 한다. <시시포스의 변수>에서는 GPT-3을 활용해 기존 관념을 분석하는데, 인공지능은 오히려 인간 중심적 관점을 해체하고, 알고리즘과 데이터에 기반한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또 다른 시점을 드러낸다. 특히 고도화된 인공지능 모델보다, 초기의 미성숙한 언어 모델이 지닌 무맥락성과 같은 한계가 오히려 더 창의적으로 평가되어, 다시금 예술과 기술의 영역에서 재감각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AI, 알고리즘,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기술을 사회 현상과 연결해 다루는 전시는 최근 몇십 연간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해 온 주제라고 생각한다. 미술뿐 아니라 인문학, 사회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인간이 인공지능에 잠식되는 순간을 포함해 그전 과정이 앞으로도 계속 연구와 분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 전시의 두 번째 작품 <뉴-빌리지> 역시 기술 발전과 인간의 사회적 조건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의도로 제작된 비디오 작업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마토'라는 모티프가 다소 무맥락하게 등장해, 작품의 예술성과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오히려 흐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미래 기술을 테스트하기 위해 만들어진 스마트 시티에서의 삶을 다루는 영상임에도, 이 주제와 토마토라는 작물 간의 연계성이나 의미적 연결 지점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토마토'가 최근 한국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니크하고 엣지있는 디자인 코드로 소비되는 문화적 맥락과 겹쳐지면서, 작품이 의도한 비판적 문제의식과는 다른 층위에서 읽히는 지점이 있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