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고야 만다
진짜 진짜 잘 쓰고 싶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어떤 표준 양식이나 트렌드에 적합하다기보단, 머리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 같은 생각들을 끄집어내 형태로 만들고 싶다. 그런 측면에서 영상 매체는 이점이 큰 것 같다. 영화와 같은 미디어는 소리도, 텍스트도, 시각까지도 모두 다 있는 그대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직관적이다. 맥락 없는 뜬구름 잡는 장면에서도, 복잡하고 미묘하면서도 아슬아슬한 인물 등에 관해 연기, 영상, 소리, 소품과 같은 연출로 하여금 메시지의 공감 여부를 떠나 자신의 세계를 표현해 내었다는 게 부럽다. 제작자나 편집 역량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어떤 이의 세계를,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걸 우리는 스크린을 꼼짝없이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그 강제성이 좋다. 실제로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 또한 그들의 세계를 경험하고 알아가기 위한 사람이기에 강제성과 한편으론 능동성 또한 갖추고 있다. 음악과 미술도 비슷한 맥락에서 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전달하거나 습득함에 있어서 가장 유리한 것은 오히려 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합의해 공통으로 사용하는 수단을 통해 언어를 구성하여 단어와 문장을 조합하고, 셀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통해 말한다. 이러한 수단은 전달이나 설명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소통의 오류가 적다는 점에서 가장 직관적이고 편리한 표현 수단이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 있어 가장 아쉽고 답답한 부분은 그러한 나의 세계를 정확한 단어나 어떤 문장으로 충분히 표현해낼 수 없다는 점이다. 단순히 난민 다큐를 보고 슬프다, 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다.라는 문장을 넘어 그 내면에 깊이와 감정을 문장에 담아내고 싶다. 정말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 날씨 좋은 날 광장에서 숨을 크게 들이쉴 때, 늦은 오후 놀이터에서 꺄르륵 거리는 아이들을 볼 때와 같이 일상의 순간에서도 감각이나 감정을 적확하게 말하고 싶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라는 문장은 너무 많은 것을 포괄하기에 편리하지만, 섬세하고 예민한 부분까지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버린다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이 많다. 나는 이 형용하기 힘든 감각들을 꾸역꾸역 어떻게 해서든 형용해 내고 싶다. 지금은 매우 부족하다. 내 지식이나 능력 선에서 원하는 만큼의 형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가능할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소리치고 싶은 세계의 정확한 크기조차도 가늠할 수도 없고, 왜 굳이 목 아프게 소리쳐야 하는지, 그냥 ‘형용할 수 없는‘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근데 그냥 가장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서, 기뻐서, 외로워서 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그중 정말 작은 부분만 겨우 나타낼 수 있다.
위인들이 평생 동안 연구해 얻은 깨달음을 개념화하여 언어로 옮겨 이론을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위인의 위대함을 느낀다. 예를 들어, 맑스가 가난한 자가 왜 계속 가난한지에 관해 자본주의 산업의 구조적 모순을 발견해 자본론을 쓴 것과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설령 물리적인 것이라도 그 지점을 파악한다는 점도 존경스럽지만, 사실 나는 추상적인 개념과 감각을 세상에 통하는 언어로 끄집어 내어 설명하고, 설득했다는 점이 더 와닿는다. 위인이 되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원하는 만큼 실컷 표현하는 사람으로 크고 싶다. 아인슈타인이 죽고 나서 모두들 그의 뇌를 해부해 보고 싶어 난리였다고 한다. 만약 정말로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이것이 어떠한 신체적 영역의 범주라면, 나 또한 뭐라도 가르고 싶을 것이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 영화나 그림이 좋고 글이 매우 소중하다. 라따뚜이에서 쥐가 요리하고, 피카소가 그림을 휘갈겨 놓아도 언젠가는,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통해 세상을 본다. 글은 언어를 통해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여 단어를 만들고, 그것을 어디에 배치할지, 어떤 문법을 사용할지 등에 관해 수많은 고민 끝에 문장으로 탄생한다. 그래서 글이 좋다. 누군가의 고민 끝에서 셀 수 없는 경우의 수를 통해 전하고 싶은 게 대체 무엇일까 고민하는 게 정말 좋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더 풍부하게 해주는 건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음악 또한 소중하다. 글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그림 또한 어떤 걸 어떻게 조합하는지에 따라 나오는 셀 수 없는 많은 경우의 수를 통해 조합된다. 소리를 어떤 높낮이로 어떤 박자로 어떻게 사용할지에 따라 음악이 만들어진다. 그 셀 수 없는 경우의 수 중 하나라는 게 좋고, 아직도 셀 수 없는 무궁무진한 경우의 수가 기다린 다는 게 너무 좋다. 이 경우의 수를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언어로 사용한다는 게 매력적이다. 안타까운 일인지, 아쉬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글과 그림, 음악 중 내가 가장 익숙하고 사용하는 데 편한 수단은 글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 글을 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영화도 만들고 싶고 그 영화에 들어갈 음악 작업도 하고 싶다. 그림은 차마 그리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계속해서 그들의 언어를 살피고 싶고 그것을 또 나의 글로 설명해 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꼭 그럴 것이다. 내가 죽기 전까지 글을 쓴다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언어로 세계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을 지 잘 모르겠다. 그게 단순히 글이라는 표현 매체가 가진 한계보다도, 그냥 내 개인의 능력에 관한 영역일까 무섭기도 하다. 부럽다 정말. 부러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에게는 쓰레기 같은 영화, 썩은 음악, 나무에 미안한 글일지라도 결국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였고, 어떤 이에게는 작가나 감독의 세계를 이해하는 혹은 공감하는, 더 나아가 설득 당한다는 점에서 존경스럽다. 글을 너무너무 잘 쓰고 싶어서, 그러니까 나를 너무너무 설명하고 싶어서 끄적이다 어느 지점에 다다랐을 땐 나의 세계 혹은 표현 매체 둘 중 하나가 무너져 그저 그런 사람이 될까 봐 무섭다. 사실 그저 그런 사람도 괜찮은데. 오히려 부럽다 나도 그냥 깔끔하게 모든 걸 다 온전히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쏟아낼 수 있다면, 그런 방법이 있다면 죽어도 좋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은 하지만 정작 블로그에서도 글 쓰는 데 감을 잡지 못해 너무 진지하기엔 진부해서 괜히 둥둥 띄우고, 가볍게 말하다 보니 점점 쓰는 단어나 어휘가 한정되고 모든 글이 다 비슷해져 예전만큼 쓰는 것에서 오는 기쁨이 적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많이 듣고, 본다. 잘 구워진 씨디나 훌륭하지만 변태 같은 작가나 감독들이 만든 작품을 보면서 열심히 부러워하고 또 배우고 쓰고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