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러브 부르디외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상] 일부 발췌
예를 들어 음악 취향만큼 한 사람의 '계급'을 분명하게 확정해주고, 이것만큼 틀림없이 한 사람을 '분류해'줄 수 있는 것도 없다. 이 경우 그에 상응하는 성향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이 아주 드물기 때문에 음악회에 가거나 '귀족적인' 악기를 연주하는 것(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이것은 아직 연극을 보러가거나 박물관을 관람하는 일 또한 현대 예술작품을 전시해놓은 화랑에 가는 일보다는 대중적이지 않다)보다 '계급분류적인 작용'을 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음악적 소양'을 과시하는 일이 다른 경우처럼 문화적 소양을 드러내는 일과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적 규정과 관련해 볼 때, '음악적 소양'은 음악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의 양 또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과는 좀 다른 것이다. 음악은 정신예술 중에서 가장 '정신적인' 것으로, 음악에 대한 사랑은 '정신적 깊이'에 대한 보증이 된다. 단지 오늘날 세속화된 종교언어적 함의를 갖게 된 '듣는 일'과 관련된 모든 어휘에 얼마나 엄청난 가치가 부여되고 있는지만 생각해보면 충분할 것이다.
다양한 용어나 표현으로 변주되어 나타나는, 음악의 혼이니 영혼의 음악이니 하는 용어가 잘 보여주듯이 음악은 '가장 심원한' '내면성'('내면의 음악'이라는 용어를 보라)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연주회는 정신적이다. 대중과의 관계가 영혼과 육체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부르주아지 세계에서 '음악에 대한 둔감함'은 의문의 여지없이 물질만 중시하는 야만적인 심성을 가장 께름칙하게 드러내는 형태를 대변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음악은 특히 순수한 예술이다. 이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며, 말할 것이 하나도 없다. 단 한번도 진정한 의미에서 표현기능을 수행한 적이 없는 음악은 따라서 드라마, 즉 극히 세련된 형태를 취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사회적 메시지를 갖고 있으며 관객들의 가치나 염원과 직접적이고 심원하게 일치해야만 비로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드라마와 대립된다. 연극은 관객을 나누고, 또 연극 그 자체를 나눈다. (중략) 음악은 부르주아적 에토스가 모든 종류의 예술에 대해 요구하는 세계 특히 사회 세계에 대한 부정 중 가장 급진적이며 절대적인 형태를 대변한다.
대략 인상 깊었던 부분..
1. 음악 취향은 사람의 계급을 가장 잘 드러낸다.
- 클래식 음악 감상, 음악회 가기, 바이올린/피아노 같은 악기 연주는 어릴 때부터 교육/시간/경제적 자원이 있어야 가능(이런 취향을 갖게 되는 조건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다) > 그래서 누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문화 환경에서 자랐는지 드러남. 다시 말해 음악 취향은 사람을 분류하는 힘이 매우 강함.
2. '음악적 소양'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 음악적 소양 ≠ 음악 지식 (음악적 소양은 단순히 음악을 좋아한다. 많이 듣는다의 개념이 아님)
ex) 교향곡을 듣고 자연스럽게 집중함. 연주회 예절을 몸으로 앎. 클래식 음악을 '고상하다'고 느끼는 감각
> 공부로 단기간에 생기는 게 아니라 사회화 과정에서 몸에 배는 취향 = 음악적 소양을 아비투스에 가까움
*음악을 이해하고 느끼는 걸 개인의 영혼이나 깊이 때문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사회적 환경에 의해 형성되고 분류된 것이라고 보는 듯
3. 음악이 특히 '고급 예술'로 여겨지는 이유
- 음악은 흔히 '영혼의 음악', ' 내면의 울림', '정신적 예술' > 가장 순수하고 정신적인 예술로 여겨지는 경향 有
> 그러나 사실, 음악 취향은 사회적 조건(계급 이데올로기)에서 만들어졌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개인의 정신적 깊이라고 착각함
4. 왜 음악이 '가장 순수한 예술'이라고 하는가
- 연극, 소설, 영화와 달리 음악은 '이야기 없음', '사회적 문제 직접 언급 없음', '메시지 없음' 그래서 흔히 "순수 예술"로 여겨짐 *이 부분에서 음악은 부르디외 시기의 음악이니까 지금같은 대중가요 개념은 아닌 듯
> 이러한 특성으로 음악은 사회를 말하지 않는 척하면서 사실은 부르주아적 세계관을 가장 잘 표현하는 예술이다
*클래식같은 음악이라 생각하면 이해되는데 그 외에 음악에는 사실 공감가진 않음. 고전/근대적 음악을 말하는 듯
> 음악은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예술. 반면, 연극 같은 예술은 사회적 예술을 담기 때문에 관객의 가치관과 맞아야 이해됨. 때문에 연극은 관객을 갈라놓지만, 음악은 사회적 의미를 제거한 가장 '순수한 예술'처럼 보임. 바로 이 부분이 부르주아적 예술관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줌(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초월하려함)
> 이러한 이유로 음악 취향은 개인의 정신적 깊이를 보여주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계급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문화적 신호
*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이론과 영국문화연구에서의 예술을 접하는 관점의 차이를 느낌.
부르디외는 문화가 계급 구조를 재생산하는 방식을 분석 > 문화=계급 구별 장치(지배구조 유지하는 메커니즘)
영국문화연구는 문화가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방식을 분석 > 문화=저항의 상징 (하위계급이 문화로 저항함)
나는 그동안 '예술'이라는 것을 특정한 능력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물론 예술이나 예체능을 할 수 있는 환경에는 분명 사회적 배경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체능 전공처럼 어떤 분야에서는 분명 더 특화되거나 특출한 사람이 존재하고, 그리고 그 재능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여겨왔다. 다시 말해, 재능의 영향이 크다고(적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부르디외에 따르면 그것 또한 결국 자본에 의해 구별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지점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예술이라 함은 그 집단에서 최소 한명씩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재들은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진다. 부르디외와 문화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이러한 문화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속에서 불평등이 형성되고 재생산되는 구조를 고찰하고 비판할 수 있따는 점에서 흥미롭고 의미 있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내가 향유하고 동경해 왔던 예술이 더 이상 특별한 존재라고 느껴지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자본의 이데올로기나 계급적 아비투스에서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본질적으로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을 둘러싼 믿음에 관해 분석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천재'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 왜 어떤 사람은 천재로 인정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교육, 전시, 네트워크 등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조명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술은 사회적면서도 여전히 놀라운 것이다. 사회적 조건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같은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모네스킨이 나오고, 한국에는 롱타임노쉿이 나와도 대한민국에 사는 나는 여전히 나고, 이탈리아에 살았더라고, 그것 또한 여전히 나다.
사회적 조건을 이해하는 것이 단순히 예술에서 느끼는 사랑이나 감동이 사라짐을 의미하지는 않느다. 오히려 그 감동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더 복잡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한편으론 오히려 그 복잡성이, 순수하게 다가오던 감정 속에 세속적이고 부차적인 요소들을 무의식적으로 고려하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된다. 특별히 예술에 한해서만 비판적 시각을 벗어 던지고 순수한 감정으로 바라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존경하는 부르디외의 의견에도,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회학과 그 관점에도 모순되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때문에 어떤 존재만큼은 어떠한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다. 억지로라도 외부의 자극이나 견해를 차단해 들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결국 순수하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영역 또한 어떤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이니까. 나이 반오십 가까이 되어서 뒤늦게 예술병에 걸린 걸까? 나는 쓸데 없는 생각과 말이 너무 많다.. 부르디외를 공부하면서 이 관점을 사회학이 아닌 미학이나 철학, 그리고 학문에서의 예술에서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