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그림일기
초록이 멈추었을 때 그 존재를 한껏 드러내는 것들이 있다. 이듬해에 번식을 준비하는 열매와 씨앗들이다. 누렇게 시들어버린 식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창 꽃이 피어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려한 색을 뽐내던 꽃도 아름답지만 요즘 들어선 꽃 진 자리에 맺힌 열매의 형태에 유독 눈길이 간다. ‘꽃이 진 자리가 더 아름답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 보니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는 나이에 접어들었나 보다.
따스한 세피아톤의 SNS 사진처럼 아련한 느낌을 주는, 겨울에 만나는 식물을 나는 좋아한다.
산책길에 만나는 열매를 보며 꽃이 피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쓴다.
‘저 들풀은 여름에 어떤 모습이었더라?’
마치 제 몫의 삶을 잘 살아낸 맑은 노인의 얼굴에서 그의 젊은 시절을 상상하 듯, 열매와 씨앗을 야무지게 남기고 말라버린 식물의 싱싱했던 모습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늘 그 자리에서 생의 주기를 반복했을 풀들에게 이제야 관심을 기울인다. 지난 모습이 기억나지 않아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날이 풀리면 새 잎이 돋고 때가 되면 꽃은 다시 피어날 테니.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식물은 계절에 따라 조용히 제 소임을 다할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산책은 그들의 존재를 발견하고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식물과 곤충, 나무와 열매를 찾고 그 주변에 존재하는 작디작은 세계를 찾아 헤맨다. 바라보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자연물을 채집해 집안으로 들이기 시작했다. 도감을 찾아 통성명을 하고 그림으로 기록한다. 내 책상은 자연이 불러들인 채집물과 온갖 색상의 색연필과 연필들, 다양한 펜과 수채화도구로 늘 엉망이다. 야생의 동식물을 수렵채집하던 옛사람의 DNA가 내 안에 살아있음을,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하게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가 만난 작은 세계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싶었다. 도화지를 잘라 실과 바늘로 엮어서 책이라는 집을 만들었다. 커튼으로 썼던 리넨천을 잘라 하드커버 표지를 감싸고 "숲"이라는 글자로 수를 놓았다.
숲과 들판에서 만난 작은 생명들을 연필로 그리고 물감으로 채색한다. 펜과 연필로 대략의 스케치를 할 때도 있고 색연필을 뾰족하게 갈아 칠하거나 세필을 써서 섬세하게 색을 입히기도 한다. 어떤 재료를 쓰는가는 내가 기록하려는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오리나무, 쇠물푸레나무, 신나무를 비롯해 박새, 오목눈이, 큰허리노린재, 모시나비, 노루발, 며느리밥풀, 개머루 등 지난 2년간 숲과 들판에서 만난 생명들이 이 책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림으로 기록하는 과정은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산호랑나비 애벌레를 그리지 않았다면 그 화려함과 보드라움을 모르고 평생을 살았겠지. 야생화처럼 섬세한 구조와 아름다움은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참개구리를 통째로 입에 문 유혈목이를 내 발치에서 목도하고 온몸이 얼어붙던 기억도 생생하다. 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고 그들의 표정을 그리면서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독처럼 퍼지던 감각. 야생은 잔혹한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
지난여름, 무성한 관목숲에서 발견한 곤충을 보며 전율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왕사마귀, 긴 호랑거미, 큰 허리노린재, 짝짓기 중인 모시나비 한쌍. 덤불숲은 수많은 곤충의 얽히고설킨 서식지였다. 내 심장은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동으로 약동했다. 내가 이 작은 생명들과 함께 지구에 살고 있다는 현실감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인간과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는 존재들. 이 생명들을 더 많이 알아가고 싶다. 그들이 서식할 집을 또 한 채 지어야지. 실과 바늘로 한 땀 한 땀 단단하게 엮은 집에 그들을 초대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