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조각들

낙엽

by 바람풀


내 11월 사진첩엔 다양한 잎 모양의 단풍사진으로 가득하다. 이맘때 산책에서 돌아오면 내 손엔 언제나 낙엽이 들려있고 책상 위에는 말라가는 잎들이 쌓여간다. 반으로 접으면 신발 모양이 되는 신나무잎, 날아가는 새를 닮은 백합나무잎과 다정히 손을 내미는 듯한 단풍나무잎, 물결 모양의 떡갈나무와 갈참나무잎, 마주난 잎들이 가느다란 날개를 펼친 것 같은 메타세쿼이아잎 등.


나무에 달린 단풍보다 낙하한 잎들을 더 좋아한다. 나의 눈은 바닥을 향하고 걸음은 자꾸 느려진다. 떨어진 잎들을 땅 위에 모아놓고는 이리저리 배치를 해본다. 샛노란 은행나무잎 곁에는 선홍빛 단풍나무잎을, 그 아래엔 감빛 느티나무잎과 계수나무잎을... 그림을 그리듯 이파리 하나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색과 모양이 어울리는 배치를 한다. 이맘때 즐기는 나만의 놀이다.

연둣빛이 감도는 은은한 달빛과 꽈릿빛, 노르스름하고 불그스름한 빛

이 신비로운 빛깔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올가을에는 한마을에 사는 이웃들과 식물드로잉 수업을 했다. 다들 도시에서 귀촌한 사람들이다. 마당 한구석에 좋아하는 꽃을 심어 가꾸고 휴대폰 속 사진첩이 철 따라 피고 지는 식물로 가득한 이웃들. 모두들 길을 걷다 마주친 들꽃의 이름이 궁금해지는 나이다. 평소에 찍어둔 풀꽃의 이름과 특징에 대해 서로 알려주고 이야기 나누며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는 시간이다.

11월에는 주로 식물의 잎을 그렸다. 누군가 집 마당에 있는 단풍나무 잎을 잔뜩 가져왔다. 싱그러운 풀냄새가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채웠다. 나무에서 갓 떨어져 나온 단풍나무잎을 소중한 예술작품을 다루듯 테이블 위에 한 장 한 장 펼쳐놓았다. 한 나무에서 이처럼 다양한 빛깔이 나올 수 있다니 그저 신비롭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색이다. 수많은 날들의 노을이 내 손바닥 반 만 한 크기의 잎 속에 오롯이 담겨있었다.

서로 만난 적 없는 잎들을 한 곳에 펼쳐놓으면 그 다채로운 빛의 향연에 난 황홀히 넋을 잃는다. 복잡하고 미묘한 잎과 잎맥의 모양은 내 시선을 오랫동안 붙잡아둔다. 빈 도화지 위에 물감을 풀어 빛의 무늬를 새긴다. 자연이 빚어낸 섬세한 무늬와 빛깔이 너무 눈부셔서. 이 아름다움이 너무 찰나여서. 이 계절을 즐기는 나만의 방식이다. 이번에는 이웃과 이 찬란한 순간을 함께 한다. 물감을 섞어 물의 농도를 조절하며 도화지를 물들인다.




잎이 물드는 현상은 나무가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초록색 색소인 엽록소로 인해 녹빛을 띠던 잎이 가을이 되면 녹색이 점점 빠지면서 빨갛고 노란 색소들이 드러나는 게 우리가 보는 단풍이다. 나무에서 영양분이 가장 많은 곳은 뿌리도 줄기도 아닌 잎이다.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고 에너지를 만드는 잎.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겨울을 이겨내는 에너지가 모두 잎에서 나온다. 나무는 겨울이 오기 전 식물세포가 얼어붙는 피해를 막기 위해 잎자루에 ‘떨켜층’을 만들어 잎에 있던 양분을 모두 줄기로 이동시키고 물과 양분 흡수를 차단한 다. 그리고 긴 겨울을 맞이한다.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의 자태는 얼마나 근사한가? 이보다 더 가벼울 순 없다는 듯 홀가분한 모습이다. 불필요한 욕망을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자유로운 현자의 모습이다.


연노랑 물감이 마르기 전에 주홍빛을 머금은 붓을 도화지에 갖다 댄다. 재빨리 선연한 핏빛을 잔뜩 묻힌 붓을 그사이 어디쯤에 대고 지긋이 칠한다. 세 가지 색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서로 스미고 섞인다.

잎을 그리며 깨닫는다.

소멸이 이토록 찬란하다는 사실을.

이듬해 봄을 위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내년 가을에는 또 어떤 빛의 조각들을 만나게 될까?



화양계곡에서 만난 잎들 ⓒ 바람풀


빛의 조각들 ⓒ 바람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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