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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자화상 그리기

by 바람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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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덕꾸덕하게 올라온 아크릴물감을 말리기 위해 창문을 연다.

혜아가 그린 자화상 위로 봄기운이 내려앉는다.

창가에 어룽대는 햇살을 좋아한다.

창문을 열었을 때 흙으로 덮인 운동장이 보이면 좋고,

아이들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넘실대면 더더욱 좋다.

효과 빠른 신경안정제를 삼킨 듯 마음이 스르르 해진다.


오늘은 3주간 진행한 자화상 그리기 마지막 날이다.

미술 교과 수업을 담임 선생님을 대신해 마을 예술가가 진행하는 방식으로 5년째 하고 있다.

갓 입학해서 솜털이 뽀송뽀송하던 아가들이 열두 살이 되었다.

'난 네가 여덟 살 때 교실 바닥을 뒹굴며 괴물 그림만 그리던 걸 기억해.

손에 물감이 묻는 걸 끔찍이 싫어했지'

'선생님, 사랑해요. 그림 그리다가 갑자기 내게 사랑 고백했던 네 모습도 잊을 수 없지.'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난 네가 **하던 걸 기억해"라고 해 줄 말 하나씩을 갖고 있다.


열두 살, 열세 살 아이들 마음에 씨앗 하나가 톡 떨어진다.

단단한 껍질로 봉인된 씨앗.

'나는 누구인가?'

모호한 질문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끝을 알 수 없는 씨앗의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알브레히트 뒤러부터 렘브란트, 빈센트 반 고흐, 프리다 칼로를 지나 최욱경, 천경자의 자화상 작품을 보여준다. 그림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나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써보며 씨앗의 발아를 위해 한 발짝 다가간다. 아이들이 글을 적는 동안 각자 원하는 포즈로 찍은 사진을 프린트해 준다.

이제 내 모습을 어떻게 그릴지 스케치한다. 바탕은 무슨 색으로 칠할지, 배경을 어떻게 처리할지, 프리다 칼로처럼 내면의 상태를 보여주는 상징물을 그림에 넣을지 등등.

두 번째 시간에는 원하는 색으로 백붓을 이용해 캔버스 전체에 배경색을 칠하고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는다. 지브리 OST가 교실 안에 잔잔히 흐른다. 아크릴 물감은 색을 계속 쌓아 올려야 제맛, 물감의 특성을 스스로 알아가며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한다. 어린 예술가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이다.

세 번째 시간에는 세부 묘사와 마무리를 하고 합평을 한다.


"이 그림은 십 년 뒤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렴.

3주 동안 열심히 그렸으니 아무 데나 두지 말고 잘 간직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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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 쏟아진 봄 햇살만큼이나 눈부신 작품들.

나도 두려움 없이 자화상을 그릴 수 있을까?

수업 내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말은 언제나 내게 해주고픈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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