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보내는 편지

잘 걸어가자

by 바람풀

벌써 올해 마지막 날이네.

고등학생이 되니 참 힘들지?

밤늦게 귀가해서 늘 자정 너머 잠드는 너를 보며 항상 안쓰러웠어.

1년간 학교 생활하느라 진짜 고생 많았어. 토닥토닥.


해마다 이맘때면 엄마가 하는 연례행사가 있단다. 작년 이맘때 일기장을 펼쳐 보는 거지.

그날의 일이 빼곡히 적힌 글과 그림을 만나면 잊고 있던 장면이 떠올라 기쁘고, 날짜가 비어 있으면 나한테 서운한 마음이 들어. 그래서 미래의 나를 위해 일기를 쓰지. 작년 12월 30일엔 네가 집에 오는 길에 데려온 얼룩이 새끼 고양이 얘기가 적혀있더라. 눈과 코에 진물이 잔뜩 붙은 어미에게 버림받은 고양이었어. 네 흰 티셔츠에 고양이를 고이 싸서 종이상자에 담아두었지. 넌 침대 옆에 상자를 두고 잠을 잤고, 다음 날 아침 옷장 안에 상자를 넣어두고 학교에 갔지. 바닥에 수건을 깔고 핫팩까지 넣어준 걸 보고 뭉클했던 기억이 나. 핫팩을 만져보니 어찌나 뜨겁던지 새끼 냥이 엉덩이에 불이 나지 않았나 걱정이 될 정도였어.

그게 처음이 아니었지. 네가 처음 데려온 흰 고양이는 밤새 네 옆에 있다가 다음날 숨을 거두었고 난 뒷산 입구에 우뚝 서 있는 키 큰 낙엽송 밑에 묻어주었더랬지. 동생이 키우겠다고 이웃집에서 데려온 새끼고양이를 점점 나 몰라라 할 때 넌 밥을 챙겨주고 씻겨주고 놀아주고 지금까지 우리 집에서 제일 잘 돌봐주고 있잖아.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길고양이들 밥 챙겨주는 게 네 일과가 되었지.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이 네 안에 깊게 자리 잡고 있어. 그런 사람에게선 빛이 난단다. 주위에 온기를 퍼뜨리는 은은한 빛.



우리는 저마다의 속도로 주어진 길을 걸어가고 있지.

엄마도 여전히 내게 주어진 길을 걷는 중이란다. 주변 환경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속도대로 잘 걸어가자. 내가 잘 가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 때도 있고 길을 잃고 헤맬 때도 참 많아. 그래도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나를 묵묵히 믿어주자. 엄마 몸을 빌려 세상에 나왔지만 우린 서로 살펴주고 도와주는 동반자라고 생각해. 엄마가 놓치는 아주 사소한 부분들을 넌 그냥 지나치지 않지. 그런 너를 통해 배우는 점도 많단다. 지금처럼 가려진 진실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시선을 놓지 않으며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잠시 헤맬지라도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어. 네가 가는 길이 진리임을 희미하게 알 게 될 거야.


“대체 어디를 걷고 있는가. 그건 다른 사람의 길이 아닌가. 그러니까 어쩐지 걷기 힘들겠지. 너는 너의 길을 걸어라. 그러면 멀리까지 갈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중에서


딸에게.jpg ⓒ 바람풀



모든 걸 잘하려고 너무 애쓰지도 말자.

넌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네가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말기를 바라. 대신 꿈은 크게 가지렴. 꿈이란 이루기 위한 실체라기보다 나 자신을 알아가는 끊임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꿈을 향해 걸어가는 너 자신을 항상 아끼고 돌봐줘야 한단다.



가끔은 네 마음에 고요히 흐르는 물길을 잘 들여다보렴. 막힘없이 잘 흐르고 있는지 말이야.

며칠 전에 읽은 ‘혼모노’의 작가님이 작가 노트에 적은 글로 이 편지의 마지막을 대신할게.


‘흐르다’라는 말이 좋다. 움켜쥐고 붙잡아두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아니 꽤 자주) 그저 흐르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그렇게 흐르다보면 슬픔이 기쁨으로 뒤바뀌고, 팽팽한 긴장도 한풀 꺾이고 절망이 견딜 만해지는 순간도 오는 것 같다. 모든 것을 붙잡아두지 않고 가만히 흘려보내는 것. 뭐가 되든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 그렇게 잘 살아보고 싶다. 뭐가 되든 될 거라는 낙관도, 될 대로 되라는 터프함도 포용하며, 힘주지 않고 유연하게, 부드럽게.

[작가노트] 케세라세라(Qué será, será) 성해나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중에서


또 편지할게.

2025년 12월 마지막날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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