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하기
최근에 퍼블리에서 기획자들에 대한 커리어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기획자, PO, PM과 관련된 커리어를 쌓아오신 다른 연사분들과 함께 제품을 만드는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발표했다. 사실, 이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내용보다 그 광고가 나에겐 화제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광고에 “(전)뱅크샐러드 PM “이라고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업계의 많은 분들이 그 광고의 타깃이 되었고, 퇴사 여부와 함께 어디로 이직했는지 물어보는 메시지를 꽤 받았다. 당시에 나는 아이템에 대한 검증을 하고 있는 단계였고, 아직은 준비가 덜 되어 있다는 생각에 퇴사 후 창업 준비 중이다 라는 이야기 정도만 드렸다. 그리고 언젠가 PoC(Proof of Concept)를 마치고, 아이템을 확정하게 되면 개인 신상에 대한 업데이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올리면서 페이스북이나 링크드인에도 개인 신상을 업데이트하며 더 많은 분에게 소식을 전하고, 좋은 분들을 소개 부탁드리고자 한다.
창업에 대한 고민을 하며 4월 말부터 첫 아이템을 시작해볼 때는, 창업을 통해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가장 컸다. 스타트업에서 8년간 고생하면서 스톡옵션으로 받은 주식을 통해 많은 돈은 아니지만 고생한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건방지게도 내가 창업을 하면 그동안 경험한 걸 잘 활용하여 더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한 달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사이드로 함께 시작한 동료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빠르게 이탈하였고, 내가 생각했던 첫 서비스의 테스트 결과도 좋지 못했다. 그 사이에도 여러 회사에서 이직 제안을 해주셨고, 당시 나의 환경을 활용해 여러 회사의 대표님과 경영진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요새 핫한 PO/PM의 커리어를 그냥 이어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흔들리는 나를 바라보며 창업에 대해 더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창업에 대한 고민은 사실 내 인생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동안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의사결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살아온 과정과, 그동안 써온 글, 대학생 때와 최근에 경험한 창업과정에서의 나의 감정을 돌이켜보았다. 그러면서 내가 언제 즐거운지, 행복한지,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게 가치 있다고 느낄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등 사춘기 때의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다.
창업을 다시 도전하고 이 경험을 성공적으로 만들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이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나는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스스로 열등감을 많이 느껴왔다. 그래서 스타트업을 거치면서 일과 성장에 집착하기도 했지만, 나의 성과를 과장하는 모습을 스스로 많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과거의 나를 이겨내고 싶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극복해내고 싶다.
그리고 고객과 사회에 정말 필요한 제품/비즈니스를 오래오래 만들고 발전시킬 수 있다면, 그 과정이 힘들더라도 버텨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나는 삶의 여유가 많이 생겨서 취미생활을 많이 하는 시기보다, 진짜 고객이 원하는 걸 고민하고 만들어갈 때 더욱 삶의 활력을 많이 느꼈다. 그래서 이왕이면 이런 일을 20년, 30년을 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창업은 잘 이겨낸다면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그 과정을 잘 이겨낼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만드는 과정이 즐겁기 때문이다. 물론 현타도 오고, 좌절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제품을 기획하고 만들어갈 때는 아득한 몰입을 경험한다. 이를 위해 새로운 시장에 대해 알아가고, 고객을 인터뷰하고, 플레이어들과 미팅하며 배우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일을 오래오래 해나가고 싶다.
창업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서비스를 준비했다. “세컨드 스쿨”이라는 타이틀로, 은퇴를 준비하거나 은퇴하신 분들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직업 교육, 부업 교육 콘텐츠를 기획해서 제공하였다. 그 결과 중장년들이 은퇴 후 새로운 직업에 대한 갈망은 있지만, 전문적인 교육은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다음으로는 핀테크의 경험을 살려 중장년들이 온라인/모바일 상에서 원하는 상품을 탐색하고 구매하는 경험을 개선하고자 여러 시도를 해봤다. 온라인/모바일 구매가 어려운 중장년들이 자식들에게 구매를 대신 요청하는 것에서 힌트를 얻고 전화나 카톡으로 결제를 대신해주는 “톡 페이” 서비스를 구상하였다. B2C, B2B 모두 시도하며 테스트해봤지만, 온라인에서 접점을 가질 수 있는 고객은 이미 결제를 너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7월부터는 어머님과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보살핌이라는 이름으로 방문요양 중개 서비스와 관련한 가설을 테스트 해왔다. 장기요양 등급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하는 고객을 위해 장기요양 예상 등급 조회 기능을 구현해보았고, 장기요양 등급 신청을 어려워하시는 분을 위해 장기요양 등급 간편 신청 기능을 만들었다. 고객이 방문요양에서 어떤 서비스를 원하고, 어떤 요양보호사를 원하는지 실제로 매칭까지 진행하며 검증하였다.
보살핌은 갑작스럽게 가족을 집에서 돌봐야 하는 보호자분들이 겪는 막막함을 해결하고, 어르신들에게 전문 요양보호사를 파견하여 일상생활을 영위하도록 돕는 서비스이다. 이 과정에서 보호자들의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노인장기요양보험 혜택을 받도록 도와드리고, 필요한 요양보호사를 매칭 시켜드리며, 정기적으로 서비스 제공사항을 공유한다. 또한, 직접 어르신 돌봄을 하는 요양보호사분들에겐 일한 만큼의 보상을 제공하고, 불합리한 업무 지시 없이 표준화된 업무만 수행할 수 있도록 가이드하고 있다.
방문요양은 연간 4조 원의 시장이고, 장기요양 전체로 보면 10조가 넘는 아주 큰 시장이며 고령화로 인해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이다. 전국에는 16,000개가 넘는 방문요양센터들이 있지만, 영세한 규모로 운영되는 탓에 돌봄의 질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아직 방문요양 시장에서는 지배적인 회사나 제품이 없으나 조금씩 스타트업들이 생겨나고 있고, 최근에는 많은 투자금이 유입되면서 앞으로 주목받을 시장이라고 생각한다.
4월 말에 처음 시작하며, 사이드로 함께 일을 해온 분도 있고 전업으로 해온 분도 있었다. 그러나 각자의 사정과 아이템이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이탈하는 일들이 있었고, 결국 보살핌은 얼마 전까지 혼자서 만들어왔다. 거기다 개발자분을 창업 멤버로 모셔오는 것이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어서, 지금은 여러 가지 No-code 툴을 통해 웹 사이트와 웹앱을 구현하면서 PoC를 진행해왔다.
sixshop, softr, webflow, bubble, imweb 등 여러 가지 노코드 툴을 통해 간단한 랜딩페이지부터 어느 정도의 기능이 담겨있는 웹앱까지 개발자 없이 할 수 있는 시도들은 다 해왔다. 가장 중요한 가설을 담은 페이지나 기능이 구현되면, 페이스북/네이버/구글 광고 콘텐츠를 만들거나 설정하고 실제 고객이 얼마에 반응하고 얼마나 넘어오는지를 측정하며 가설을 검증해나갔다.
현재 보살핌은 이런 검증 결과로 살아남은(?) 아이템으로, 제대로 팀도 꾸리고 투자도 유치하여 더 발전시켜볼 생각이다. 다행히, 헬스케어 스타트업에서 PO와 BD경험을 쌓은 분이 합류하였고, 방문요양센터에서 3년 정도 실무경험을 해온 사회복지사분이 10월 말부터 출근한다. 이제는 혼자서 만들기보다 팀으로 각자의 전문성을 살리며 창업에 도전해나갈 것이다.
창업의 과정은 역시나 쉽지 않다. 혼자서 하는 과정도 녹록지 않았지만, 함께 일하는 분들을 찾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거기다 보살핌을 처음 시도한 7월 이후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시장에도 플레이어들이 많이 생겨서 경쟁에 대한 고민도 많아졌다. 그럼에도 계속하는 이유는 서두에 언급한 창업을 시작한 이유와 맞닿는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던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끌 것이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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