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돌보기부터 유럽 크루즈까지
다가오는 봄 일정이 빡빡하다. 2월 말부터 5월 말까지 내 발걸음은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또 다른 곳으로 분주하게 이어진다. 느긋했던 일상이 갑자기 바쁘게 돌아간다. 꽉 찬 일정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겁이 나면서도 설렌다.
우선 2월 말 둘째 손주를 출산하는 며느리가 병원과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 우리 부부는 경기도 아들네 집에 머물며 두 살이 좀 안 된 첫째 손주를 돌보기로 했다. 3월 중순까지 재롱둥이 손자와 매일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아침마다 배시시 웃음을 띠며 할머니, 할아버지를 반겨줄 손자의 발그스레한 얼굴을 떠올리면 벌써부터 미소가 지어진다.
4월 초에는 대학 친구들과 중국 시안으로 칠순 여행을 떠난다. 내가 대학을 1년 늦게 들어가 친구들은 올해가 칠순이다. 처음으로 함께 가는 여행이라 기대가 된다.
그리고 4월 중순에는 네덜란드에서 남편의 학회 회의가 있다. 원래는 네덜란드 일정을 마친 후 한국에 들렀다가 5월 중순에 있는 둘째 외손녀의 첫돌을 보러 미국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한국을 방문 중인 미국 사는 여동생이 "네덜란드 간 김에 크루즈 어때? 크루즈여행 하고 암스테르담에서 직접 미국으로 가면 편할 텐데"라고 말했다. 여동생은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하는 노선이 많다며 크루즈여행을 적극 추천했다.
크루즈? 처음에는 고개를 저었지만, 네덜란드에서 한국, 다시 미국으로 이어지는 빠듯한 일정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차라 귀가 솔깃해졌다. 짐을 싸고 풀 필요 없이 여행 내내 같은 객실에 머물면서 배가 내려주는 항구 주변을 돌아보는 크루즈여행은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느긋하고 편할 것 같았다.
여동생이 보내준 크루즈 사이트를 둘러보다가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해서 아일랜드와 영국을 한 바퀴 돈 후 다시 암스테르담에 도착하는 여행 코스가 눈에 띄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떠나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은 아일랜드의 남쪽에 있는 ‘코크’(Cork)다. 요즘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이 쓴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을 읽고 있는데, 이 소설이 바로 코크에서 탄생했다. 키건이 코크대학에 상주작가로 있을 때, 매춘여성과 미혼모 등 당시 성윤리를 위반한 여성들을 가두고 학대한 ‘막달레나 세탁소’ 관련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었다고 한다. 한 인터뷰에서 키건은 기사를 읽다가 갇힌 사람을 구해내는 소설의 주인공이 머리에 떠올랐다고 말했다.
두 번째 도착지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워터포드’(Waterford)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주인공 빌 펄롱의 아내 아일린은 딸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바로 이 워터포드에 간다. 아직 산타클로스를 믿는 어린 딸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 아일린은 버스를 타고 워터포드로 향한다. 구글 지도를 찾아보니 빌과 아일린 가족이 사는 뉴로스 작은 읍에서 인근 큰 도시인 워터포드까지 23.6km, 차로는 25분 거리다. 크루즈 일정에서 처음 알게 된 코크와 워터포드 두 도시를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소설 속에서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갑자기 이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다음 행선지는 영국이다. 비틀스의 고향인 잉글랜드의 ‘리버풀’(Liverpool) 그리고 웨일스의 ‘홀리헤드’(Holyhead)로 향한다. 영어의 대세에 밀려 사멸 위기에 처했다는 웨일스어에 관한 글을 읽은 후 웨일스에 관심이 생겼다. 영국 국기인 유니온잭을 만들던 시기는 웨일스가 이미 잉글랜드에 합병된 뒤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와 달리 유니온잭에서 웨일스가 빠져 있어 이 또한 애잔함을 불러일으킨다. 웨일스 사람들은 유니온잭에 웨일스를 상징하는 빨간 '용'도 함께 포함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1912년에 침몰한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가 만들어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Belfast)도 간다. 다음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Glasgow)에 도착한다. 넷플릭스에서 재미있게 보고 있는 영국과 미국의 합작 드라마 ‘아웃랜더’(Outlander)의 배경지다. 그리고는 마지막 여행지인 스코틀랜드 북쪽 끝 ‘러윅’(Lerwick)으로 향한다. 러윅에서 거친 바다와 절벽이 만드는 장관을 본 후 처음 출발했던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간다.
아일랜드의 코크와 워터포드부터 영국의 리버풀(잉글랜드), 홀리헤드(웨일스), 벨파스트(북아일랜드), 글래스고와 러윅(스코틀랜드)까지 7개의 항구 도시 모두 안 가본 곳이다. 그리고 각 도시마다 흥미와 관심이 가는 스토리가 있다. 항해 기간도 마지막 직소 퍼즐 조각처럼 우리 일정에 딱 들어맞아 이 크루즈가 마치 우리를 위해 준비된 맞춤 여행처럼 느껴졌다.
여동생 부부도 여행 항로가 마음에 든다며 네덜란드로 날아와 크루즈에 합류하겠다고 했다. 크루즈 경험이 많은 동생네가 함께 간다니 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나가면 또다시 이런 기회가 오기 힘들다. 나이가 들수록 기회가 왔을 때 흘러 보내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제부는 우선 네 개의 객실 유형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고 했다. 창문이 없는 ‘인사이드’(Inside), 창문이 있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오선뷰’(Ocean View), 창문 외에 베란다가 있는 ‘발코니’(Balcony), 그리고 창문, 베란다뿐 아니라 거실과 침실이 따로 분리된 ‘스위트룸’(Suite). 여동생은 창문이 없는 인사이드는 답답하다며 오션뷰를 추천했다. 그런데 오션뷰는 벌써 모두 나가고, 가격이 높은 발코니와 스위트룸만 남아 있다.
오션뷰가 없어 망설이고 있으니, 여동생은 발코니로 하더라도 ‘개런티 객실’(Guaranteed Cabin)을 택하면 가격이 낮아진다고 했다. 개런티 객실은 배에 승선할 때 남아 있는 객실 중에서 임의로 배정받는 방이다. 남아 있는 방이 엘리베이터 옆, 배의 뒷부분이 될 수도 있다. 여동생은 웃으며 그렇지만 행운의 여신이 나타나 객실을 깜짝 업그레이드시켜 줄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혹시 모를 행운을 기대하며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개런티 객실을 택했다.
크루즈여행이 끝나면 바로 미국 딸네 집으로 떠난다. 5월 중순에 있는 둘째 손녀의 첫돌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다. 두 손녀들이 일 년 사이에 얼마나 컸을지 또 무슨 예쁜 짓들을 할지 기대가 된다. 딸은 부지런히 비행기 일정을 검색해 알려온다. 직장 다니며 두 아이를 키우는 바쁜 워킹맘이라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일정이 한꺼번에 몰려 2월 말부터 5월 말까지 바쁘게 정신없이 보내게 되었다. 꽉 찬 일정을 체력이 잘 받쳐줄지 걱정이 되지만, 설렘과 기대감이 더 크다. 특히 처음 경험하는 크루즈여행이 빡빡한 일정 가운데 느긋하고 여유 있는 쉼과 휴식을 선사하는 선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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