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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배기 손자와 함께한 할머니의 행복한 15일

by hazel

며느리가 둘째를 출산하느라 병원과 산후조리원에 있는 15일 동안, 남편과 나는 경기도 아들네 집에 머물며 곧 두 살이 되는 첫째 손주를 돌봤다. 사실 돌봄을 주었다기보다는 두 살배기 손자로부터 오히려 우리가 기쁨과 행복을 한가득 받았다.


한창 낯을 가리는 손자는 얼마 전까지도 할머니가 안으려고 두 팔을 벌리면 주춤하며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엔 할머니 껌딱지가 되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작은 손으로 내 바짓가랑이를 잡아 끈다. “할머니 바쁘니까 할아버지랑 노세요”라고 말하면 대답 대신 내 옷자락을 더 세게 잡아당긴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거실로 안고 나가 공을 굴려주자 금세 까르륵까르륵 웃음꽃이 만발한다. 이젠 할아버지랑도 친해졌다.


음식을 달라고 할 때도 행동이 말보다 앞선다. 과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딸기를 보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찡찡댄다. 찡찡대지 말고 “딸기 주세요” 하라고 하면 바로 두 손을 서툴게 모으고 “딸기 주세요”를 따라 한다. 말만으로도 충분한데 딸기 하나 얻으려고 두 손까지 모으는 모습이 왜 이렇게 짠한지! 손자는 ‘주세요’라는 말과 두 손 모으는 행동을 한 세트로 인식하는 듯하다. 유아식판에 딸기를 담아주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밥도 좋아한다. 숟갈에 밥을 떠 놓으면 야무지게 숟갈을 들어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가끔씩 밥에 비벼주라고 며느리가 애기용 짜장, 카레, 국 등을 1회 먹을 양으로 소분하여 냉동실에 쟁여 놓았다. 조금 덜어 먹어보니 간이 되어있지 않은 밍밍한 건강식이다.


채소와는 아직 친해지지 못했다. 국에 든 배춧잎을 잘게 잘라줘도 용케 알아내고 뱉어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빨간 파프리카를 고춧가루처럼 갈아 작게 자른 무에 버무린 아기용 깍두기는 좋아한다. 미니어처 깍두기는 작고 앙증맞아 손자처럼 귀엽다. 밥에 깍두기를 얹으면 밀쳐내던 밥숟갈도 끌어당긴다. 어린이집 원장님이 손자가 잘 먹는다고 알려줘 준비해 놓았다는 아기용 깍두기는 보기에는 영락없는 매운 빨간 깍두기다.


장난감은 두 개씩 쌍으로 가지고 노는 경우가 많다. 튤립 모양의 세 개 마라카스 중, 흰색은 놔두고 빨강과 노랑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다니며 노래를 듣는다. 어떤 때는 빨강과 노란 투명 큐빅을 들고 와 마라카스 위에 색깔 맞춰 올려놓기도 한다. 할머니 눈에는 손자의 이런 행동이 신기하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색깔에 남다른 호기심이 있어 보인다.


물리학자이자 동화작가 크리스 페리에 교수가 쓴 시리즈 중에서 겉표지가 노란 <아기를 위한 퀀텀 물리>와 <아기를 위한 퀀텀 컴퓨팅> 두 권을 손자가 골라 들고 온다. 내 무릎 위에 앉더니 노란 퀀텀 책을 읽어달란다. 노랑 표지에 끌렸나? 아니면 물리 전공자인 아들이 자주 읽어주었나?


모양에도 관심을 보인다. 자석 칠판에 붙어있는 A와 V 알파벳 두 개를 들고 와 “앗! 비슷하네!”라고 말하는 모습이 어찌나 놀랍고 예쁜지.


플라스틱 바퀴는 두 개가 아닌 세 개를 바닥에 놓고 빙글빙글 돌린다. 크기가 같은 바퀴를 돌아가면서 돌리며 “빨강, 연두, 노랑! 똑같지. 똑같애. 다 똑같애!”라고 소리친다.


공을 던지고 받는 놀이를 하면 땀이 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손자에게 “이제 세 번만 더 하자”라며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면, 손자도 고사리 같이 작고 여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세 번 마지막”을 외친다. 손자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가 새롭고 경이롭다. 물론 세 번 끝내고도 공놀이를 더 하자고 떼는 쓰지만.


어린이집은 아파트 1층 공동현관문을 나서면 바로 앞에 있다. 덕분에 손자를 데려다주고 데려오기가 수월하다. 멀리 지방으로 직장을 다녔던 나로서는 지척인 거리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선생님들도 친절하고 아이들을 성심껏 돌봐준다. 손자가 어린이집에서 무엇을 먹고 무슨 활동을 했는지, 누구랑 친하게 지내는지 등을 세세하게 적은 일지와 사진, 동영상도 보내줘서 손자의 일상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식구가 늘어 지금 집이 좁을 것 같은데, 아들 부부는 좋은 어린이집이 가까이 있어 한동안은 이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밤에 통잠을 자기도 하지만 손자는 새벽에 깨서 공놀이를 하자고 조르기도 한다. 이웃에 방해가 될까 봐 조심스럽지만 막무가내다. 달래 가며 조용히 다독이다 보면 손자 눈이 스르르 감긴다. 부드러운 머리칼, 손과 발을 쓰다듬으며 “엄마가 섬그늘에”를 나지막하게 불러준다. 내 품속에 안겨 잠드는 손자의 모습이 천사처럼 사랑스럽다. 이렇게 손자를 돌보며 느끼는 행복감과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며느리가 갓난아기와 함께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왔다. 생명을 탄생시키느라 며느리가 고생 많았다. 세상 빛을 본 지 이제 보름 남짓 된 아기는 코가 오똑하고 손자처럼 인중이 뚜렷하다. 갓난 여동생 옆에 서 있으니 지금까지 아기로만 보이던 곧 두 살 되는 손자가 갑자기 소년처럼 훌쩍 커 보인다.


이제 남편과 나는 서울 우리 집으로 떠난다. 보름 동안 손자와 친해져서 뿌듯한 마음으로 아들네 집을 떠날 수 있다. 다음 주부터 삼 주간 육아도우미가 아침에 집에 와서 저녁까지 도와준다니 다행이다. 고맙게도 나라에서 일부를 보조해 준단다. 도우미가 오지 않는 주말 그리고 밤은 여전히 힘들 텐데... 두 살 배기 손자가 새벽에 깨고, 두세 시간마다 밤새 갓난아기를 수유해야 하는 며느리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해 어떻게 견뎌나갈지 걱정이다.


우리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휴대폰을 여니 손자가 여동생 아기에게 연두, 노랑, 파랑... 색깔을 바꿔가며 딸랑이를 흔들어주는 동영상이 와 있다. 걱정했던 마음이 누그러지고 며느리와 아들이 두 아이 육아를 잘 해낼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이 다. 물론 많이 힘들겠지만, 서로 의지하며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만 두 살이 되는 손자와 갓 태어난 손녀가 건강하고 밝게 자라나기를 그리고 사랑을 나눌 줄 아는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안정되어 손주들 나아가 우리나라 모든 아이들이 자기 꿈을 펼쳐갈 수 있는 안전한 터전이 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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