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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경계

며느리가 전 혼인에서 낳은 아이도 가족인가요?

by hazel

같은 동네에 사는 고등학교 친구랑 전철을 타고 반창회에 가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밀린 얘기가 많다. 친구는 자주 만난다는 지인 이야기를 꺼냈다. 지인의 이혼한 딸이 대학 선배를 우연히 만나 재혼까지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보니, 몇 년 전 혼자된 아들도 마음이 통하는 좋은 짝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친구는 말했다.


친구 지인의 딸은 번째 결혼에서 얻은 어린 아들이 하나 있다. 초혼인 대학 선배 남편은 부인이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무척 귀여워한다. 똘똘한 아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힘껏 뒷바라지하겠다고 다.


시어머니 입장은 달랐다. 며느리가 전 결혼에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마뜩잖게 여겼다. 결혼은 허락했지만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며느리가 전 혼인에서 낳은 아이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새로 꾸린 가정은 봄햇살처럼 따스하다. 얼마 전에 딸도 낳아 네 식구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시댁 갈 때는 세 식구만 간다. 시댁에서는 며느리가 전 결혼에서 낳은 아들은 없는 존재다.




가족들이 할머니 집에 갈 때 혼자 떨어져 있어야 하는 아이에게 짠함을 느끼며, 나는 최근에 읽은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Foster)를 떠올렸다.


<맡겨진 소녀>의 주인공 소녀에게는 도박과 술을 좋아하는 책임감 없는 아빠 그리고 소녀와 여형제들, 남동생을 돌보며 임신까지 한 상태로 집안일에 농사일까지 떠맡아야 하는 지칠 대로 지친 엄마가 있다. 부모에게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소녀는 말이 없고 움츠러든 아이가 되었다.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한다. 가난하고 힘겨운 삶에 짓눌린 엄마는 임신한 배가 불러오자 소녀를 여름 방학 동안 친척집에 맡기기로 한다. 무심한 아빠는 딸을 낯선 집에 남겨두면서 아이의 짐보따리를 차에서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소녀에게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서둘러 떠나버린다.


아일랜드 작가 프랑크 매코트가 쓴 회고록 소설 <안젤라의 재>(Angela's Ashes)에서도 안젤라의 남편은 무책임하고 대책이 없다. 굶고 있는 아이들과 아내는 안중에도 없고 실업 수당을 술 마시는데 써버린다.


작가 키건은 한 인터뷰에서 아일랜드 남편들이 소설에 대부분 책임감 없는 무능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맡겨진 소녀>에서는 괜찮은 아일랜드 남편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맡겨진 소녀>에서 소녀를 임시로 돌봐주게 된 아일랜드 남편은 작가 키건이 의도한 대로 괜찮은 사람이다. 남편과 그의 부인은 소녀가 집에 있는 동안 세심한 배려와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첫날밤 익숙지 않은 침대에서 오줌을 지린 소녀가 민망하지 않도록 매트리스가 원래 습기를 잘 머금는다며 소녀를 감쌌다. 소녀는 가난한 자기 집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따뜻한 욕조 목욕과 몸에 딱 맞는 새 옷을 사 입는 호강을 누렸다. 더럽고 어질러진 소녀의 집과 달리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서 소녀는 집안 루틴을 차근차근 익혀나갔다. 철자 읽는 법을 배워 책 읽는 습관도 갖게 되었다. 우편함까지 뛰어갔다 오는 달리기 연습도 하였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순록같이 빠르게 달릴 거라는 칭찬도 들었다. 처음으로 주변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소녀가 변해 갔다. 소녀는 집에서 느끼지 못했던 가족의 의미와 사랑을 깨닫기 시작했다.




친구 지인의 딸이 전 결혼에서 낳은 아들과 <맡겨진 소녀>의 소녀가 대비된다. 지인 딸의 아들은 시댁에서는 없는 존재다. 피가 섞이지 않은 며느리의 아들을 시어머니가 보려 않기 때문이다. <맡겨진 소녀>의 소녀는 피를 나눴지만 무관심한 아빠와 엄마에게는 옆에 어도 또 옆에 어도 보이지 않는 없는 존재다. 그렇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임시 부모에게 소녀는 항시 보이는 존재다. 소녀가 하는 일거수일투족에 관심과 사랑의 눈길을 준다.


친구 지인 딸의 아들과 <맡겨진 소녀>의 소녀를 보면서 우리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얼마나 좁게 설정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피가 섞이지 않은 손자를 외면하는 시어머니의 심정이 이해는 된다. 나도 그 상황에 있었다면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그렇지만 피로 맺어진 관계만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다. 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더라도 서로를 향한 마음과 이해가 있으면 함께 훈훈한 가족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맡겨진 소녀>에서처럼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임시 부모와 자식도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며 소중한 인연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좀 더 유연하고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할 것 같다. 우리가 가족이라고 선을 그은 경계를 넘어서야 할 것 같다.


친구의 지인 이야기를 들으며, 이전 결혼에서 낳은 지인 딸의 아들아이가 새로 생긴 가족에게 인정받으며 따뜻한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자라날 수 있기를 소망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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