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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 Mar 01. 2022

요즘은 '백 세' 시대, '온 살' 시대?

고유어 숫자와 한자어 숫자

승용차 안에 앉은 K가 컴퓨터 화면에서 인사를 건넨다. 직장과 가정 일로 항상 바쁘게 동동거리는 K는 갑자기 회사 일이 많아져 오늘은 차 안에서 수업을 받을 거라고 했다. K-드라마를 좋아하는 만큼 바쁜 틈에도 한국어 수업을 빠지지 않으려는 뜨거운 열정이 느껴져 가르치는 나도 신난다.


지금 LA는 몇 시예요? K에게 물었다. 

“네 시, 사 시?K가 머뭇거렸다.

시간은 고유어 숫자라는 힌트를 주었다.

“아~~  시. 

“맞아요. 오후 네 시. 한국은 지금 오전 아홉 시예.라고 말해주었다.


K는 한국어 숫자를 알고는 있지만 갑자기 한국어로 시간을 말하려면 헷갈려한다.


한국어에는 수를 세는 방법이 고유어와 한자어 두 가지여서 외국인들이 어려워한다. 보통 고유어는 작은 숫자에 쓰이고, 한자어는 큰 숫자에 쓰인다는 느슨한 틀은 있지만 칼로 무 자르듯 딱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숫자를 읽을 때 멈칫거린다.


고유어는 ‘하나, 둘, 셋, 넷  … 열하나, 열둘’. 시간은 고유어를 쓴다. 그렇지만 하나는 ‘한’으로 변해 ‘한 시’와 ‘열한 시’로 쓰고, 둘은 ‘두’로 바뀌어 ‘두 시’와 ‘열두 시’로 그리고 ‘셋’과 ‘넷’은 ‘세 시’와 ‘네 시’로 쓴다. 나머지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은 그대로 쓰면 된다고 K에게 설명했다.


분을 말할 때는 한자어를 써서 ‘일 분, 이 분, 삼 분, 사 분’으로 쓴다. 한 분, 두 분, 세 분, 네 분’과 같이 고유어와 함께 쓰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네 시 세 분’은 ‘네 시에 세 사람 예약이 있다’라는 의미로 들린다.


나이 세는 방법도 만만치 않다.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 열 살’ 등 적은 나이는 보통 고유어로 사용한다. 나이가 많아지면 고유어인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 쉰 살, 예순 살, 일흔 살, 여든 살, 아흔 살’도 쓰지만, 한자어인 ‘이십 세, 삼십 세, 사십 세, 오십 세, 육십 세, 칠십 세, 팔십 세, 구십 세, 백 세’도 사용한다.


백 세에 해당하는 고유어가 없네. ‘백 세는 고유어로 뭘까?


‘백’의 옛말이 ‘온’이니까 ‘백 에 해당하는 고유어는 ‘온 살’이 되지 않을까? ‘온 살’. 예쁘다. 예쁜 표현이네. 요즘은  세’ 시대라고 하는데, 나이를 투명하게 그대로 드러내는 한자어 백 세’ 시대와 더불어 꽉 차서 원숙하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고유어 온 살’ 시대 함께 사용하면 어떨까?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을 찾아보니 ’을 의미하는 ‘온은 물론 온 살’도 없었다. 이미 없어진 옛말이라 표제어로 올라오지 않은 듯했다. 띄어쓰기 없이 붙여 쓴 온살’은 찾을 수 있었는데 한 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태어난 아이가 꽉 차게 먹는 나이’로 정의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1월에 태어난 아이는 같은 해 12월에 태어난 아이와 같은 나이임에도 거의 1년이나 먼저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나이를 꽉 차게 먹었다는 의미에서 온살’을 먹은 아이다. 백 세 의미를 가진 고유어를 찾다가 맞닥뜨린 온살’은 100세와는 너무나 다른 뜻을 갖고 있다.


영어에도 보통 쓰이는 아라비아 숫자 외에 로마 숫자가 있다. 물론 활용도는 매우 낮다. 로마 숫자는 특히 이름이 같은 왕이나 여왕, 교황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다. 올해 즉위 70주년을 맞은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한국 땅에 입맞춤을 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의 이름에 있는 로마 숫자 II는 the second로 읽는다. 두 개의 세계 대전을 구분하기 위해서도 로마 숫자를 쓰는데 제2차 세계 대전(World War II)에 있는 로마 숫자 II는 two로 읽는다. 똑같은 II이지만 서로 다르게 읽는다.


끊임없이 변하는 속성을 가진 언어는 획일적이지 않고 유연성이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K가 고유어와 한자어 숫자의 어려움을 딛고 한 걸음, 두 걸음 꾸준히 걸어 나가서 언젠가는 K-드라마를 자막 없이 볼 수 있는 환한 터널 끝에 다다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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