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의 '만'과 영어의 '10사우즌드'
한국어 숫자와 영어 숫자
고유어 계통의 숫자에 이어 오늘 수업에서는 한자어 계통의 숫자를 공부했다. 한국어와 영어 숫자는 서로 세는 기준점이 달라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 K에게 우리말 숫자는 만만치가 않다.
영어는 ‘천’을 기준으로 삼는다. ‘사우즌드(thousand, 천)’ 앞에 ‘10, 100’을 붙여 ‘10사우즌드, 100사우즌드’가 된다. ‘1000사우즌드’는 없고 대신 다음 단계인 ‘밀리언(million, 백만)’으로 넘어간다. ‘밀리언’ 앞에도 ‘10, 100’을 얹어 ‘10밀리언, 100밀리언’이 된다. 역시 ‘1000밀리언’은 없다. 다음 단계는 ‘빌리언(billion, 10억)’이다. 빌리언도 ‘10빌리언, 100빌리언’을 거쳐 ‘트릴리언(trillion, 조)’이 된다. 즉 세 자리마다 단위가 바뀐다.
한국어는 ‘만’을 기준으로 ‘만’ 앞에 ‘십, 백, 천’을 붙여 ‘십만, 백만, 천만’이 된다. 그다음은 ‘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억’ 앞에 ‘십, 백, 천’을 넣어 ‘십억, 백억, 천억’ 그리고 ‘조’로 넘어간다. 영어보다 ‘천’이란 단계가 하나 더 있는 셈이다. 즉 영어의 세 자리 대신 한국어는 네 자리마다 단위가 바뀐다고 K에게 말해주었다.
한국어 영어
천 1,000 thousand
만 10,000 10 thousand
십만 100,000 100 thousand
백만 1,000,000 million
천만 10,000,000 10 million
억 100,000,000 100 million
십억 1,000,000,000 billion
백억 10,000,000,000 10 billion
천억 100,000,000,000 100 billion
조 1,000,000,000,000 trillion
영어 숫자는 세 자리마다 단위가 바뀌기 때문에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아라비아 숫자와 잘 맞아떨어져 읽기가 편하다. 반면 네 자리마다 단위가 바뀌는 한국어 숫자는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아라비아 숫자와 잘 맞아떨어지지 않고 어긋난다.
큰 숫자에 약한 나는 우리말 숫자와 아라비아 숫자 표기의 어긋남 때문에 사실 아직도 혼란을 겪는다. 쉼표를 두 개 찍는 ‘백만’(‘1,000,000’) 정도는 헷갈리지 않지만 백만보다 숫자가 커지면 숫자가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아 일일이 끝자리부터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어야 한다.
한 때 ‘쉼표를 만 단위로 네 자리마다 찍으면 얼마나 편할까?’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쉼표 다음에 공을 네 개 써서 ‘만’을 1,0000이라고 적고 십만과 백만, 천만은 각각 10,0000, 100,0000, 1000,0000이라고 적으면 말과 표기가 딱딱 맞아떨어져 정말 편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우리만 다르게 표기하는 것은 사실상 말이 안 된다.
만 1,0000
십만 10,0000
백만 100,0000
천만 1000,0000
억 1,0000,0000
영어의 ‘10사우즌드’(10 thousand, 만)에 익숙한 K에게 한국어에서는 ‘천’이 열 개라고 하는 대신 ‘만’이라는 독립 단어를 쓴다고 했다. K의 아버지가 요즘 만년필을 사용하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 만 년을 쓰는 ‘만년필’을 떠올리면 ‘만’을 잘 기억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내가 영어 숫자에서 겪는 어려움을 K도 한국어 숫자를 배우면서 고스란히 겪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K는 나보다 수 개념이 강하고 열심히 배우려는 의지 또한 강해 한국어 숫자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
한국어의 ‘조’와 이에 해당하는 영어의 ‘트릴리언(trillion)’은 둘 다 독립 단어로 쓴다. 그래서 기억하기는 쉽지만 K가 즐겨 보는 K-드라마에 ‘조’처럼 큰 숫자가 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