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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 Oct 31. 2023

서서히 기억을 잃어갑니다

영화「내일의 기억」의 사에키(와타나베 켄 분)

새벽에 눈을 떠서 천장을 올려다보니 빨간 숫자 6:00 선명하게 박혀있다. 딸이 미국 갈 때 두고 간 빔프로젝터 시계 덕분에 시야가 깜깜해도 누운 자세에서 고개만 살짝 젖히면 바로 시간을 볼 수 있다. 6시와 00분 사이에서 빨간 점 두 개(:)가 깜빡깜빡거린다. 두 점이 깜빡거린다는 건 시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전날 밤 11시부터 내리 7시간 잤다. 잘 자서 행복하다.


오늘같이 푹 잔 날은 침대에 그대로 누워 침대 옆 탁자 위 충전기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집어든다. 핸드폰 화면을 톡톡 쳐서 우선 내가 자는 동안 7개월 된 친손자 사진, 동영상이 새로 올라왔는지를 점검한다. 없으면 어제, 그제, 그저께 올린 사진들을 다시 본다. 남편이 옆에서 자고 있어 소리가 나는 동영상은 그냥 넘긴다. 한 달에 한 번씩 몰아서 올리는 2년 6개월 된 외손녀 사진도 찾아본다. 카톡도 보고 뉴스도 보고 브런치 글도 읽는다. 브런치에는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다. 글을 잘 쓰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 주제도 다양해서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어느새 새벽 먼동이 튼다. 프로젝터 시계는 깜깜할 때만 시간이 선명하게 보인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빨간 글자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창밖의 햇빛이 밝아질수록 숫자는 힘을 잃고 점점 희미해진다. 천장 속으로 사라져 가는 숫자를 바라보면서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일본 영화 「내일의 기억」(감독: 츠츠미 유키히토)을 소환한다. 한창나이인 49세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주인공 사에키(와타나베 켄 분)가 매일 다니던 익숙한 거리에서 길을 잃어 갈팡질팡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사에키는 광고회사에서 능력이 넘치던 부장이었다. 큰 광고를 따내는 성과를 이룬 후 계속 할 일이 많았는데 너무도 일찍 알츠하이머병이 찾아왔다. 사에키의 기억은 점점 사라졌다. 기억을 붙잡으려고 하지만 사에키는 거래처와의 미팅도 잊고 주위 사람들의 이름마저 잊었다. 왕성하게 활기차게 일하던 사에키에게 알츠하이머병이 다가오고 있는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선명했던 사에키의 기억이 사라지듯이 날이 밝아옴에 따라 시계의 숫자가 밝음 속에 묻혀간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애를 써봐도 천장의 시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보일 듯 말 듯 7:41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젠 더 이상 숫자가 보이지 않는다. 사에키가 영화 끝부분에서 아내 에미코(히구치 카나코 분)도 못 알아볼 정도로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듯이 천장에 쏘아진 시간도 완전히 사라졌다. 



친정 엄마가 초기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으셔서 먹먹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다. 다행히 아직 자식들과 사위∙며느리들, 손주들, 형제자매들은 알아보시지만 혼자서는 생활하실  없다. 옆에서 누군가 늘 돌봐드려야 한다. 방금 점심을 잘 드시고도 "우리 점심 안 먹어?"를 묻고 또 물으시는 엄마. 고인이 되신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긴 인사를 나누시고도 돌아서면 무슨 일을 했는잊어버리시는 엄마.


햇살을 받아 천장 속으로 꽁꽁 숨어버린 프로젝터 시계의 숫자처럼, 처음 보는 사람인 양 아내의 이름을 묻는 사에키처럼 엄마가 남아있는 기억마저 완전히 잃으실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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