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역할을 맡은 것뿐이다
군 제대 후 올해 휴학을 하며 자연스레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다행히도 나는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 가족 모두가 집을 비우면 집안일은 오롯이 나의 책임이 된다.
집청소, 밥 차려 먹기를 반복하며 1년 가까이 지냈다.
나의 태도가 어느새 주부의 것과 닮아 간다는 것을 느낀다.
되도록이면 외식, 배달보다는 냉장고에 시들어가는 재료들을 활용하는, 가족들이 사용한 물건들을 한숨을 쉬며 제자리에 돌려놓는, 약속 시간을 집안일에 맞추어 잡는 등 나에게서 주부의 모습을 발견한다.
특히, 주말이 되면 손에 주부 습진이 생길 정도로 미루었던 화장실 청소나 주방 청소를 하고는 한다(우리 엄마가 주로 이러곤 했는데..).
이러한 생활을 하다가 가끔 친구와 만나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수다를 떨며
커피를 즐기고 있노라면 이보다 더할 나위 없음을 느낀다.
그러던 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에서 인상적인 글을 읽었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주부적’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속성 중에서 대다수는 결코 ‘여성적’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즉 여자가 나이를 먹는 과정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주부적인 속성을 익혀 나가는 게 아니라, 그것은 단지 ‘주부’라는 역할에서 생겨나는 경향, 성향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한다.'
'주부적'은 결코 '여성적'과는 다른 속성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부라는 역할을 경험하면, 주부적 속성을 이해하고 다른 주부들을 공감할 수 있다.
부부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은 주부(주로 여성)와 직장인(주로 남성) 사이의 이해관계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년 정도 주부를 경험하게 된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말하자면, 세상의 남자들은 일생 중 적어도 반년이나 1년 정도는 '주부'역할을 해보아야만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단기간이나마 주부적인 성향을 몸에 익히고, 주부적인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아야만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 동안의 경험은 부부 사이의 수많은 갈등을 해결해 줄 것이다.
가끔 오랜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데 친구 어머니는 출근하는 동시에 집안일 또한 도맡아 하신다.
무려 두 가지의 역할을 해내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듦을 티 내지 않으시고 묵묵히 해내신다.
어릴 때부터 뵜지만, 주부를 경험한 후에야 친구 어머니(물론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의 노고에 존경심을 느낀다. 내가 그의 입장이 되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서 함부로 누군가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새삼 느꼈다.
주부의 노동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노고를 쉽게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