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산맥 휘슬러 피크에서
해발 2500미터인 캐나다 휘슬러 피크에 오르자, 쌓여 있는 만년설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다. 그 길을 통해 더 높은 쪽으로 걸어 오르면, 길의 오른쪽에는, 오래전 내렸을 눈이 벽처럼 쌓여있다. 그 길을 지나가면서, 그 가늠하기도 힘든 세월 동안 쌓인 만년설의 하얀 벽을 손으로 만져본다.
길의 끝으로 나와 탁 트인 곳에 서서 주위를 바라보니, 봉우리는 록키산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봉우리의 어깨에 잠시 걸터앉는다.
봉우리의 왼쪽으로는 작은 마을인 재스퍼의 시내가 보인다. 그 마을에는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시속 10킬로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가 지나가면, 몇십 분간 건널목에서 한없이 기다려주는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 마을은 숲에 안겨 있고, 그 모습이 봉우리 왼쪽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한없이 여유롭지만 또 어딘가 쓸쓸한 풍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쓸쓸함에 고개를 돌려 봉우리의 오른쪽으로 내려다 보아도, 그곳에는 더 쓸쓸한 도로가 펼쳐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길은 산들을 빗겨 저 멀리까지 뻗어있지만, 어느 지점에서인가 길은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다. 그 도로는 전화도 터지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전달되는 소식에 중독된 도시 사람들에게 그 길은 쓸쓸하다. 하지만 사실, 길을 둘러싼 높은 록키산맥 봉우리들은, 시끄럽게 외치듯이 힘차게 펼쳐져 있다. 한국에서는 멀리서 관조하는 산들만 봐왔던 나는, 그 외로운 길의 주인인, 외치는 산들을 내려다본다.
어느 쪽을 바라봐도, 어두운 거울 빛의 호수들이 숲들 군데군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내려다 보인다. 내가 가 보았던 호수들, 혹은 나를 기다리는 호수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조용히 쉬고 있다. 호수의 빛깔은 푸르지만 깊게 어둡다.
천년쯤 전에, 북미의 한 인디언 전사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를 상상해 본다. 그는, 이렇게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을 테다. 그는 지평선의 끝이 휘어진 것을 보고, 세상이 둥글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혹은, 자신이 출발한 마을의 작은 움직임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한없이 작은 인생을 바라보는 신의 느낌을 엿봤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는 울 것 같은 감정에 휩싸여, 이 신비로운 곳에,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이름 하나를 붙였을 테다. 지금은 휘슬러 피크라고 불리는 이곳은, 그 인디언 전사에게는 어떤 이름으로 불렸을까? 산의 모습을 한 신들의 마을? 둥근 세상의 처마? 인디언 전사가 붙였을, 지금은 사라진 봉우리의 옛 이름이 아쉽다.
바람이 불어오는 하얀 정상 쪽에 선 누군가가, 움직이지 않고 눈을 감은채 태양을 향해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동양인처럼 생겼으나 또 그의 피부는 붉게 태워져 있다. 혹시라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사슴을 쫓느라 바짝 타버린 것은 아닐까?
그가 한참을 태양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을, 나도 가만히 쳐다본다. 잠시 후, 그는 하늘로 향한 고개를 내리고, 눈을 뜬다. 그리고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을 돌아본다. 눈이 마주친 나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다. 그도 태양을 닮은 것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는 태양을 향해 꼿꼿이 서서 신을 보았을까? 혹은 그는 둥근 지구를 느끼고 있었을까?
내려오는 길 한편에는, 만년의 눈 위에 얼마나 오래되었을지 모를 작은 돌탑이 쌓아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