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들이 무르익는 밤

어느 평범한 술자리의 모습

by 잭변 LHS

"그건 너무 당연한 것 아니야?"


술자리의 취기가 오를 무렵, 친구가 나에게 동의를 구합니다. 친구의 눈빛을 보니,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것 같습니다.


글쎄... 저는 당연한 것은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감정이건, 진리이건, 관계이건 간에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까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사실, 백만 년 전에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은, 백만 년 전에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억압에 대한 분노, 물질적 풍요에 따르는 안정과 같은 감정들은 인류 역사의 가장 최근에 발명된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똑같은 삶의 궤적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의 각기 다른 경험에 따라,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감정의 기복은 다를 겁니다. 그래서, 감정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진리라고 다르던가요. 우리가 불변의 진리라고 알고 있는 과학 진리들 조차도, 불과 100년 전에는 진리의 지위를 점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진리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발견들에 의해서 도전받고 있습니다. 상대성이론의 다음에는 무슨 이론이 또 이 우주를 설명해낼지, 불확정성의 원리는 어느 범위의 입자들에게까지 적용되는지, 우리는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최신 과학은, 치열한 토론의 장에서 다수결에 의하여 결론지어지는 경향들마저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들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관계는 또 어떻고요. 사람들 간의 이야기는 항상 생략됩니다. 텔레파시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를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근거리는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서로에게 익숙해지거나 혹은 헤어지기도 합니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어느 날 우리 곁을 떠나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후회로 남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관계도 세상에서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 긴 이야기를 친구에게 설명하려다가, 저는 그냥 술잔을 집어 들고 말했습니다.


"당연하지. 걔가 잘못했네."


당연한 것들은 없는 세상이지만, 친구와 나의 온기 어린 술자리에서는, 그 찾기 힘든 '당연함'이, 취한 채 자리를 잡습니다. 그놈을 배신한 이름 모를 누군가는 당연히 혼나야 하는 것이, 오늘 밤 우리만의 변하지 않을 진리입니다. 하여튼 이 밤의 친구와 나의 술자리에서는 그렇습니다.


친구가 벌게진 얼굴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가자. 야"

"당연하지. 그러자."


저런.. 얼떨결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영원'까지 약속해 버렸네요. 술자리의 안주에는 ‘영원’만한 것이 없죠.


재미진 밤이 빨갛게 무르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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