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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변 LHS Apr 30. 2023

‘기왕이면 병’ 애가

나는 어떻게 10만 원의 예산으로 80만 원의 아이패드를 지르게 되었는가

기왕이면 병 : 물품을 사려고 이것저것 알아보던 중에, ‘기왕이면’ 더 높은 성능과 비싼 가격의 물품을 끊임없이 새로 고르게 되는 증상. 영어로도 Upgraditis라고, 같은 의미의 단어가 있는 것으로 보면,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보임.


오랫동안 잘 쓰던 이북리더기가 최근 갑자기 말을 잘 안 듣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대체할 만한 괜찮은 이북리더기를 알아보게 되었다. 인터넷의 여러 제품평을 보다 보니, 한 10만 원 정도의 한 태블릿이, 이북리더기로 쓰기 좋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합리적인 소비자‘로 유명한 나는, 그 가성비 태블릿을 사기로 결정하고 그 제품에 관련된 평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돈을 조금만 더 보태서 20만 원 중반 정도로 예산을 잡으면 ‘업그레이드 모델’을 구매해 좋은 성능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는 글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합리적인 소비자’ 답게 약 2분간 치열한 고민을 거듭하였고, 결국 그 ‘업그레이드 모델‘을 사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결제하려고 검색을 해보니 그 ‘업그레이드 모델’도, 2020년식 모델이냐 2021년식 모델이냐에 따라 약 5만 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다시 한번 2분 30초간의 ‘합리적이고도 치열한’ 고민 끝에 나는 2021년식 가성비 업그레이드 모델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내가 사려고 하는 패드는 최종적으로 30만 원대의 가격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30만 원 대면, 이런 저가형 태블릿이 아니라 삼성에서 나온 플래그쉽 최신형 태블릿도 몇만 원 더 내서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합리적인 소비자’로 유명한 나는 다시, 10만 원 정도만 더 주고 삼성의 플래그쉽 최신형 태블릿을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인플레이션 시대니, 10만 원 차이는 그리 크지도 않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10만 원대로 시작된 예산은 최종적으로 50만 원 가까이고 늘어났고, 나는 어느새 최신 삼성의 태블릿과 주변기기를 알아보게 되었다.


이때 나는 검색을 멈추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 비극은 더 깊은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기로 마음먹은 삼성 태블릿의 요모조모를 유튜브로 알아보다 보니, 교활한 유튜브는 내게 ‘삼성의 태블릿과 애플의 아이패드를 비교하는 영상’을 추천해주고 있었다. 호기심에 시청하기 시작한 그 영상은, 삼성과 애플의 태블릿의 장단점을 용도에 맞추어 비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왠지 애플의 태블릿이, 사용용도에 더 적합한 것 같았다. (내가 스스로에게 납득시킨 그 사용용도에는 ’ 집에서 아이폰을 찾을 수 없을 때, 아이패드로 아이폰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는 용도’와 같은 이상한 용도까지 포함되어 있다.)


최종적으로 나는 비싸기로 유명한 아이패드를 사기로 했고, ‘합리적인 소비자(?)‘인 나는 기왕 아이패드를 사기로 결정한 김에, 돈을 조금만 더 얹어 정품 키보드까지 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애초 10만 원 대로 잡았던 예산을 80만 원까지로 늘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이 모든 과정이 어느 것 하나 이상하거나 비약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하나의 과정에서 나는 ‘합리적인 소비자’로서의 고민을 거듭했으니 말이다.


소형차를 알아보다가 결국 SUV를 사버린 친구의 이야기나, 원룸을 알아보다가, 결국 혼자서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기왕이면” 병은 나한테만 고유한 병은 아닌 것 같다. 이 병을 한 번씩 앓아 본 우리는, 언젠가는 고민없이 아이패드부터 고를 수 있는 날을 꿈꿔 보지만, 그런 날은, 쉽게 올 것 같지는 않다.


아이패드가 도착한 이후로 내 삶이 더 나아졌고, 나는 책을 더 많이 읽을 수 있었다는 아름다운 결론으로 이 이야기가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아이패드 구매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바쁜 생활 속에 시간이 모자랐고, 몸값 비싸게 모셔온 아이패드로 책을 읽는 시간이 더 늘어나지는 않았다. 이 아이패드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돌이켜 보면, 사실 택배로 아이패드를 받던 순간이 아닐까 한다.  그때에는 이 아이패드로 전 세계의 모든 전자책들을 다 읽어주겠다는 각오가 충만했었으니 말이다.


돌이켜 보면, 많은 소비가 그랬다. 계획했던 쓰임새는 잊히기 마련이고, 생각했던 대로의 쓰임은 진행되지 않는다. 비단 소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생의 많은 결정이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중대한 결정은 기대했던 스토리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결정을 고민하는 단계에서 나는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또 가끔은 그 결정이, 생각지 못한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아이패드만 해도, 의외의 효과가 있었으니, 브런치에 글을 쓸 때, 아이패드와 키보드의 조합은 글쓰기를 훨씬 편하게 만들어 줬다. (혹은 끝까지 내가 합리적이었다고 믿고 싶어 하는 나 스스로의 위안일 수도 있다.) 또한, 아이폰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을 때 실제로 활용하기도 좋았다.(!)


하긴.. 매번 지르고 나서 이렇게 합리화까지 해내고야 마는 것을 보면, 비싼 ‘지름’을 이렇게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도, ‘기왕이면 병‘의 마지막 증세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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