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일요일을 이기는 방법
일요일이란 단어는 입에서 둥글게 굴러간다. 분명 받침이 두 개나 있는데도, 동글동글하게 생긴 이응의 자리가 부드러워서, 일요일을 입에서 발음하면 둥글둥글하다.
어렸을 때, 일요일은 목욕의 날이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이주에 한 번 정도, 동네의 큰 목욕탕으로 갔다. 큰 목욕탕에서 아버지의 억센 손맛으로 때가 밀리는 것은 싫었지만, 목욕을 마친 뒤의 요구르트 맛은 일요일이라는 발음만큼 둥글둥글한 맛이었다. 또, 그때는 일요일 저녁 티브이에는 재미있는 프로그램도 많았다. 가족들과 둘러앉아 인생극장이나 몰래카메라 같은 프로그램들을 보는 일요일 밤은, 달달한 사탕을 한 움큼 입에 넣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른이 된 뒤의 일요일은, 월요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이 머문다. 그래서 둥글둥글하지 않은 우울함이 일요일을 감돈다. 일요일의 저녁에 월요일에 대한 걱정을 나누고 있자면, 일요일은 월요일이라는 괴물이 도착하기 전의 호러영화가 된다. 하긴 ‘어른’이라는 단어부터 니은자 받침으로 그 발음이 턱 하니 막힌다. 그래서 그런지 ‘어른의 일요일’은 둥글둥글하지만은 않다. 주중이나 토요일에 발음해 보는 ‘일요일’이라는 말은 한없이 둥글둥글하게 느껴지지만 막상 일요일이 되면 그 발음은 진이 빠진 것 같은 힘없음으로 느껴진다. 발음조차 흐물흐물하게 느껴진다.
사실 근대까지도 일요일은 종교적인 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절대 쾌락을 좇으면 안 되고, 즐겁게 놀아서도 안 되는 금욕적인 날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 엄숙한 종교적인 전통은 현대에 사라졌어도, 산업주의의 사제들이 그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인지, 일요일은 생산이라는 엄숙한 생산을 준비하는 날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달력마저도 일요일을 한 주의 맨 처음으로 그려 넣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엄밀히 ‘주말‘이라 분류되는 일요일을 한주의 맨 처음으로 표기하다니, 어쩌면 산업주의의 깊은 음모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일요일이 한 주의 처음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일요일이 한 주의 끝인지 시작인지에 대하여는 이래저래 다른 의견이 많다고 한다. 요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주말이라는 일요일의 정체성에 걸맞게 일요일을 ‘한 주의 마지막’으로 정의한다.
나도 일요일을 한 주의 마지막으로 치고 싶다. 일요일이 한 주의 시작이라면, 그것은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가 더욱 커질 테니, 나는 일요일을, 무엇의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싶다. 일요일이 무언가의 마지막이라면, 그 마지막 밤은 깨질 것 같은 숙취를 걱정하지 않는 술자리가 있어도 좋겠다.
혹은 뜨뜻한 물에 샤워를 마치고 요구르트를 하나 마신 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소 좋아하던 티브이 프로그램이라도 하나 챙겨 본다면 어린 시절의 그 걱정 없던 일요일의 몽글몽글함이 돌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