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허약함이면 또 어떠랴
여유로운 주말 오후. 나는 그 여유를 온전히 느낄 새도 없이, 무언가에 쫓겨 태블릿을 챙겨 들고 카페로 향한다.
쉬라고 있는 주말인데도 생산성에 대한 이상한 강박에 쫓겨, 나는 하릴없는 주말 오후면 카페로 향한다. 책을 읽던 글을 쓰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무의식의 강박이 주말 오후를 지배한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주말 오후 계획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에, 나는 초조하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렇게 초조해진 이유는, 아마도 내가 시간의 속도를 무서워하는 나이가 되어서일 테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생산성에 대한 강박에 휩싸여, 나는 키보드를 잡아본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쓰기 시작한 글이, 잘 나올 리가 없다. 끄적거린 글들은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쓰이지 않는 글과 씨름하다가 한숨을 쉬며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 잠깐 나온 카페 밖 거리에는, 노란빛의 은행나무가 가득하다. 바람이 불면 어지러이 떨어지는 은행잎을 보면서, 나는 어디선가 은행나무에 대해 읽었던 내용을 기억해 낸다.
은행나무는, 사람들이 따로 심지 않으면 자연에서 자생하기도 어려운 종이란다. 그 열매의 고약한 냄새를 동물이 싫어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열매가 독성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은행나무의 열매를 매개해 주는 동물들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인간이 일부러 심고 돌봐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허약한 종이다.
은행나무는 식물학상 침엽수나 활엽수 어느 군에도 들어가지 않는단다. 은행나무는 사실 아주 오래된 식물종인데, 비슷한 친척 나무들이 모두 멸종해 버렸단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문강목과속으로 분류되는 식물학으로 분류하자면, ‘은행나무문 은행나무강 은행나무목 은행나무과 은행나무속 은행나무종’으로 분류되는, 아주 외로운 종이다. 그래서 은행나무가 혹시 눈이 있어 이 세계를 바라본다면, 모조리 자신과는 닮은 구석 하나 없는 이상한 생물들만 가득하다고 느끼겠다. 그 느낌은 자신과 닮은 생물 어느 것 하나 살지 않는 외계 행성에 혼자 뚝 떨어진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은행나무지만, 한국의 가을은 그 허약하고 외로운 은행나무의 빛깔로 가득하다.
쓸쓸한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의 노란색은, 사람으로 따지면 새파랗게 질린 얼굴 표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흐드러지게 떨어져 발목을 뒤덮은 그 노란 외로움은, 얼마나 요란한 호들갑이던가.
더 초조해진 은행나무는 가을에 이르러 열심히 열매를 생산해 보지만, 매개동물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열매 냄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은행나무를 미워하지 않고 심는다. 여름 한 철 푸르렀다가 가을 한 철에는 샛노랗게 물드는 솔직한 초조함이, 인생을 닮아서인가. 냄새나는 열매 때문에 사람들은 은행나무 열매를 피하기도 하지만, 미워하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뿌리내릴 수 있게 도시 여기저기에 심어둔다. 노란 창백함을 배경 삼아 저물어 가는 일 년을 만끽해 본다.
그래. 뭐하나 생산 못하면 어떠냐. 나도 은행나무처럼 요란하게 호들갑이나 부려보자. 그게 허약한 외로움의 방증이면 또 어떠랴. 허약한 외로움의 계절인 가을이라면, 적당히 허약해져 보는 것도 운치이다.
이상한 강박은 접고, 은행에 대한 별 것 없는 글이나 하나 가볍게 쓰고 얼른 밖으로 나오기로 했다. 밤이 길어지는 시절, 계절에 대한 호들갑이나 좀 노랗게 떨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