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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변 LHS Nov 18. 2022

오토바이에 매달려 수능 수험장에 도착한 수험생

나의 구세주들께

“하 이거 큰일이네, 여기서 막힐지 몰랐는데”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의 한숨소리가 커진다. 조수석에 앉은 어머니도 안절부절이시다.


수능 시작시간은 20분 정도 남았고, 수험장까지 자동차로는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거리의 도로가 꽉 막혀 있었다. 나는 고3이었고, 집 근처의 고사장을 배치받지 못해 아버지의 차를 타고 고사장으로 가고 있는 길이었다. 나는 전날 긴장감에 네 시간밖에 자지 못해 피곤했지만, 그 피곤함 보다 시험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더 가슴을 조여왔다. 우리가 탄 차가 다음 신호를 받아 움직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조수석의 어머니가 외쳤다.


“저기! 경찰서에 세우소! 니 여기 경찰서에 일단 내리라!”


나는 어머니의 지시대로 가방과 도시락을 들고 경찰서 앞에서 내렸다. 그 사이 어머니는 먼저 차에서 내려 경찰서로 달려들어가시며, 경찰서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수험생입니더! 수험장까지 좀 보내주이소!”


경찰들은 시계를 보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저희 지금 순찰차들 다 고사장 근처로 보냈는데요. 어떻게 하지? “


그때 나이가 지긋한 경찰 한 분이 갑자기 다급하게 경찰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경찰 분은 꽉 막힌 도로를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갓길로 운행중이던 오토바이 한 대를 손짓으로 세웠다. 그러더니 나보고 경찰서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와 어머니가 경찰서 밖으로 나가는 동안, 오토바이 운전자는 경찰관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더니 배달 중이던 뒷자리 가스통 몇 통을 경찰서 앞 도로에 서둘러 내렸다. 그러더니 뒷자리를 가리키며 나에게 외쳤다.


“마! 타그라!”


나의 구세주는 가스배달 중이셨던 것이었다. 나는 가방을 메고 도시락을 들고 아저씨의 뒷자리에 앉았다.


“잠깐만! 내도 데리고 가주이소!“


그 와중에 어머니는 당신도 고사장으로 가야 한다며 내 뒤에 몸을 실었다. 어머니까지 세명이 오토바이에 타자, 나의 구세주 가스배달 아저씨는 경찰관의 눈치를 잠깐 살폈다. 하지만, 지금 경찰관도 안전운전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경찰관도 이 상황에 잠시 당황하던 눈치였지만,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오토바이 위로 사자후를 토했다.


“퍼뜩 출발하소!”


그렇게 가스배달 오토바이에 몸을 실은 셋은, 꽉 막힌 도로의 갓길과 자동차 사이를 달렸다. 운전 중이던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얼마나 웃었을지 상상이 갔지만, 그런 것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겨우 도착한 수험장 앞은 사거리에서부터 선배들을 응원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사거리에서 교문앞까지 오토바이에 실려 질주했다.


나는 오토바이에서 내리자마자 나의 구세주에게 제대로 인사할 틈도 없이 교문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도 나를 따라 달리시다가, 교문에 이르러서 달려 들어가는 내 뒤에 대고 파이팅을 외치셨다. 그렇게 들어선 수험장 교실은 너무 조용해서, 나 혼자 땀을 흘리며 숨을 쌕쌕 대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토바이를 타고 입실하는 수험생들의 뉴스를 보면 어김없이 그런 댓글이 달린다.

“그런 정신머리로 시험 보러 오는 애들, 점수가 뻔하겠다.”

정신없던 수험생의 성적표

하지만, 나는 다행히 시험을 잘 보았고, 원하던 서울 법대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때의 에피소드가 오히려 유쾌했던 이야기로 남아 있다. 총점 400점에서 11.5 점만 깎인 388.5점을 받았는데, 그 깎인 11.5점 중에 첫 교시 언어영역에서만 9점을 깎였으니, 오토바이에 실려 정신없이 질주한 아드레날린으로 집중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싶어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한 가지 정말 아쉬운 것은, 나의 구세주였던 가스배달 아저씨께 연락을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나의 구세주는 내가 교문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바로 오토바이를 돌려 경찰서로 돌아갔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도 너무 정신이 없던 통에, 아저씨의 연락처 하나 받지 못한 것이 아직도 죄송스럽다고 한다.


혹시라도 나의 구세주였던 오토바이 아저씨께서 이 글을 보시게 된다면, 꼭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때 안전운행 수칙을 위반한 오토바이를 봐주셨던 경찰관 아저씨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97년 11월 당신들께서 친절을 베풀어 주신 그때의 그 정신머리 없던 수험생 꼬마가, 결국 서울 법대에 잘 합격했고 사법시험까지 합격해 변호사가 되었다고. 당신들께서 베푸신 친절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모르실 거라고. 그래서, 나도 당신들처럼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꼭 전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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