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제법 많이 내리는 날 숲길을 찾았다. 며칠 연속으로 비가 와서인지 날씨만큼 머리가 맑지 못했다. 우산을 받쳐 들었지만 바람을 타고 굵은 빗방울이 옷을 적셨다. 숲길은 평소에 사람들로 붐볐을 텐데 그날은 인적이 끊겼다.
후두둑 후두둑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호젓한 길을 걷는 것도 꽤나 운치가 있었다. 회색 하늘과 그에 비해 조금은 옅은 저수지의 일렁이는 물결이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드럽게도 느껴졌다. 빗소리와 더불어 터벅터벅 내딛는 내 발소리를 귓가로 흘리며 한참을 걸었다.
저만치 비에 젖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길을 걷다가 다리가 아플 때쯤 아니면 한 모금 시원한 물이 생각날 때쯤 나타나는 벤치에는 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인적이 끊긴 그날은 텅 비어 있었다. 가까이 가 보았다. 물기를 잔뜩 머금고 여전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벤치에는 앉을 수가 없었다. 잠시 그 옆에 서서 가방에서 물을 꺼내 목을 축였다.
이 벤치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앉았다 갔을까? 때로는 할머니가 아픈 다리를 쉬어갔을 수도 있겠고, 때로는 아주머니들이 모여 앉아 남편이야기며 자식이야기며 푸념을 늘어놓았을 수도 있었겠다. 젊은 연인들이 앉아 저수지의 일렁이는 물을 바라보며 밀어를 나누었을 수도 있겠고,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왕년에 내가 말이지...' 하며 허풍을 늘어놓았을 수도 있었겠다.
그들은 모두 떠나고 벤치는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겠지만 아무런 말이 없다. 많은 사연들을 속으로만 품고 잠시나마 그들이 편하게 쉬어갈 공간을 내준 것에 만족할 따름일 것이다.
다시 길을 나섰다. 투둑투둑빗발이 더 거세지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이왕에 젖은 몸 더 트인 공간으로 나갔다. 저 앞에 정자가 보였다. 평소에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싸가지고 온 도시락도 먹고, 과일을 먹으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던 곳이었다. 어떤 때는 아저씨나 아주머니 몇몇이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기도 했던 곳인데, 그날은 역시 아무도 없었다.
이 정자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쉬었다 갔을까? 수백 명? 수천 명은 되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넉넉한 품을 내어주고 햇볕을 막는 그늘이 되어주기도 했을 것이었다. 잠시나마 그들이 단잠을 잘 수 있도록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도 적당히 막아 주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찾는 이 없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자 옆 울타리 위에 누군가 글자 판을 세워 놓았다. '가장 빛나는 순간'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제였을까?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어울려 거리를 휩쓸던 순간? 그래 그때는 꿈도 많았었지.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출근하던 순간? 그래 그때는 열정을 갖고 있었지.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하던 날? 그래 그때는 정말 아름다웠어. 첫째 둘째를 낳았을때?그래 정말 가슴 뭉클한 소중한 순간이었지. 회사에서 동기들보다 일찍 별을 달았던 날? 그래 그때는 정말 뜻밖이었어. 하늘을 날 것 같았지.
그러고 보니 살아오면서 빛나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지내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빛나는 순간이 아닐까? 그래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가장 빛나는 순간인 게야.조금만 욕심을 버리고, 조금만 마음을 비우자.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별게 있겠나?
우산을 치우고 내리는 비를 맞아 보았다. 얼굴에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고 이내 안경이 빗물에 젖어 앞이 흐려졌다. 하지만 날씨만큼이나 찌푸렸었던 머리가 한층 맑아졌다.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