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변보다 산길이 더 좋은 이유

그 남자의 횡설수설

by 이은호



저녁때 집 앞 하천변으로 산책을 자주 나간다. 운동삼아 슬슬 걷기도 좋고.. 사실 별 운동은 안된다.. 이것저것 눈앞에 펼쳐지는 볼거리가 많아 심심하지가 않다. 아주머니들의 라인댄스도 좋고, 웃통 벗고 설치는 헬스보이.. 이건 이제 날이 추워서 안보이겠지? 그리고 광장에서 인라인 스케이트 배우는 꼬맹이들의 왼발 오른발 뒤뚱거리는 모습도 귀엽다. 가끔 마주치는 웃통 훌렁 벗고 목에 수건 동여매고 반바지 차림에 자전거 어깨에 둘러매고 걷는 남자가 있는데, 타고 다니라고 발명한 자전거를 굳이 어깨에 메고 가는 이유는 진짜 미스터리다. 발길에 걸리적거리는 강아지도 많아서 개 산책로인지 사람 산책로인지 헷갈릴 때도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하천변 산책로가 재미가 있다. 반면에 조용히 사색에 잠기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마음을 다잡고 출발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래서 방해받지 않고 한적한 산길을 걷고 싶었다. 하천변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아파트는 단지 옆으로 해서 뒷산으로 오를 수가 있었다. 숨이 가빠질 정도로 적당히 운동도 되고 평소에는 인적도 드물어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정취가 그리워 오랜만에 그 길을 찾아보았다.



오래전엔 산길을 걷는 도중에 차도를 건너야 했는데 지금은 그 위를 도보로 통과할 수 있도록 성벽이 축조되어 산책의 흥을 깨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차들이 통과하는 문의 명칭이 '인생문(人生門)' 이란다. 어렸을 때 우리는 이곳을 '인생문 고개'라 불렀다.



거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인생문 고개를 통해 피난한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 하여 사람을 살려낸 고갯길이라는 의미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죽은 자들의 무덤을 성내에 둘 수 없어 성 밖에 있던 묘지로 옮겼는데, 그 길이 유일한 통로로 사용되어 '인생무상(人生無常)'에서 따와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한편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께 듣기로는 옛날에 이 고개에 도적들이 많았는데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언제 도적떼를 만나 화를 입을지 몰라,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길이라는 의미로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인생의 과정에서 넘어야 하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고개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생문을 지나 제법 숨이 차는 가파른 길을 따라 '북장대(北将臺)'라는 전망대에 올랐다. 거기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는 삭막한 콘크리트 더미만 수북하여 감상을 접고 반대편으로 길을 잡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서장대(西将臺)'에 도착. 주변을 둘러보다 옛 동래읍성 백성들에 얽힌 이야기를 발견하였는데 내용이 재미있어 옛이야기 두 개를 글로 옮겨 본다.



'의적 정봉서와 그 아내'


옛날 동래부에 몹시 가난한 집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정봉서는 효성이 지극하고 힘이 장사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의원에게 물었더니 개 천 마리를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하여 개를 닥치는 대로 잡게 되었다. 이것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되어 나중에는 큰 도둑이 되었다. 어느 날 동래성내의 사람들이 기장의 쌍다리 험한 고개에서 도둑떼를 만나 산중에 끌려가 떨면서, "저희들은 모두 동래성내에 살고 있사옵니다." 하고 말하니, 두목은 너그러운 표정으로 부하들을 시켜 맛난 음식을 후하게 대접하고 떠날 때 노자까지 주었다. 이렇듯 도적질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깊은 산중에 본거지를 두고 도적의 두목이 된 정봉서는 부잣집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집을 도와주는 의적이었다. 의적으로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정봉서도 말년에 동래 포졸들에게 잡혀 먹을 것을 주지 않아 15일째 되는 날 굶어 죽었다. 이 소식을 듣고 정봉서의 아내는 동헌으로 달려가 그 앞의 하마석을 번쩍 들고는 "이놈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관헌들이라고 하지만 너무 심하지 않느냐? 내 가장이 비록 도둑이었지만 의적이라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렇게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고함치며, 동헌 대문을 때려 쳐서 판자가 날아갔다고 한다.


* 금강공원 입구에는 그때 정봉서의 아내가 부순 대문 기둥으로 지은 건물이 남아 있다고 동래의 노인들은 말한다.



'박권농의 아들 설화'


임진왜란 직전 동래에 살았던 박권농은 하루살이의 비천한 몸으로, 술 마시는 일이 오직 그의 즐거움으로 어느 날 너무 취해 오늘날 도시철도 동래역 강변 모래밭에 쓰러져 잠을 자는데 도둑이 자기를 흔들어 깨우고 남루한 옷을 벗기고 있었다. 이때 역마차를 타고 순찰하던 순라군이 이 광경을 보고 "박권농이 아니냐? 이 밤중에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소리치자, 권농은 "이 분은 우리 마을에 사는 사람인데, 술에 취한 저를 집까지 업고 가려고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도둑은 감격한 어조로 "감사하오. 당신이 만약 나를 도둑이라고 말했으면 내 손에 맞아 죽었을 것이요."라고 말하며 쥐고 있던 돌을 던지고, "제가 집까지 모셔드리죠." 하고 권농을 업고 집으로 갔다. 권농은 "자식이 하나뿐이니 아들이 되어달라."고 하자 도둑은 "아버지로 모시겠사옵니다." 하고 사라졌다. 며칠 뒤 밤늦게 권농을 찾아온 양아들은 안부를 여쭙고 돈 2백 냥을 구포 만덕고개에 묻어 두었으니 오늘 밤중으로 집에 옮겨 쓰시라고 말함에 권농은 그 돈을 가져와 잘 살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동래 명문의 서동 김 씨 댁에는 출생 시부터 얼굴에 보자기를 쓴 듯 덮여 입만 내어놓고 숨을 쉬던 괴물 같은 노처녀가 있었는데, 이 딸에게 박권농의 친아들이 청혼하였다. 결혼식 날 신랑은 대를 칼 모양으로 예리하게 만들어 신부의 몸을 덮고 있던 껍질을 벗기니 놀랍게도 아주 예쁜 미인이 탄생하였다. 그 후 이 부부사이가 좋았거니와 서동 김 씨 세력으로 박 씨 후손들은 잘 살았다고 한다.



옛날에는 평범한 양민들이 탐관오리나 양반들의 수탈로 혹은 가뭄이나 홍수 등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불가피하게 도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인간의 착한 본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가난하고 불쌍한 평민들에게는 따뜻한 정을 베풀었던 것 같다. 전국 곳곳의 사정들이 다 비슷비슷하여 어디서건 전래되는 옛이야기들 속에서 그런 사연들을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찾은 동래읍성 산길에서 하천변에서와 같은 다채로움이나 번잡함은 못 만났지만, 대신에 곳곳에 전해져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동네 산길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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