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줄리아(하)

by 이은호



J기업에서 인사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 이사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유럽지사에 출장을 와 있었다.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낸 김 이사는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낯선 잠자리 때문인지 아니면 시차 때문인지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 깜빡 잠이 들었었다. 그래도 두세 시간 푹 자서 인지 컨디션이 괜찮았다.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볼일을 본 후 샤워 꼭지를 틀고 머리부터 물을 받았다. 몸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물이 한결 부드럽게 느껴졌다. 흥흥~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시계를 보니 박 부장이 오기로 한 시간과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김 이사는 느긋하게 편한 복장을 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여유를 즐기며 조식을 챙겨 먹은 김 이사는 에스프레소 한잔을 뽑아 들었다. 가끔 정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을 때 진한 커피를 마시곤 하였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 것 같았다. 진한 커피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객실로 다시 돌아온 김 이사는 옷을 갈아입고 로비로 내려갔다. 그리고 조금 있으려니 박 부장의 모습이 보였다.


"형님, 잘 주무셨어요? 별일은 없었고요?"


"별일? 그런 건 없었고, 잠은 그런대로 잔 것 같네."


김 이사는 전날밤 어둠 속에서 빛나던 금발 여자의 하얀 허벅지와 종아리를 떠올리며 대답하였다.


"그럼 이제 가보실까요?"


박 부장의 말에 김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나란히 주차장으로 향했고, 박 부장은 운전석에 그리고 김 이사는 옆좌석에 몸을 실었다. 도심을 벗어난 차는 탁 트인 교외를 한 시간쯤 달려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 회사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경비실에 용무를 밝힌 후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다.


잠시 응접실에 앉아 있으려니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섰다. 나이는 삼십 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뒤로 단정하게 묶은 금발머리에 감색 투피스 정장을 한 깔끔한 모습이었다. 하얀 피부에 파란 눈 그리고 꼭 다문 붉은 입술, 어딘지 모르게 도도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진 도브리."

"..??.."


박 부장이 환한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도 뭐라고 인사를 하며 박 부장의 손을 잡았다. 박 부장이 김 이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분이 이 회사 구매팀장인 줄리아입니다. 이곳 발음으로는 율리아죠."


박 부장이 그녀에게 김 이사를 소개하였다. 그녀는 이사와 악수를 하며 살짝 웃어 보였다. 그러자 다소 차갑고 도도해 보이던 그녀의 첫인상은 어디로 사라지고 다정하고 정감 넘치는 얼굴로 변했다. 김 이사는 미소 하나로 사람이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나 하고 깜짝 놀랐다.


박 부장과 그녀가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김 이사는 커피만 홀짝였다. 단 한마디, '폴란드의 첫인상이 어땠냐?'는 그녀의 질문에 '여러모로 참 매력적인 곳이다.'라고 대답한 것 외에는.


두 사람은 젊은 남자 직원의 안내로 현장 견학을 하였다. 그 회사는 산업용 설비를 생산하는 회사였는데 제법 규모가 컸다. 대형 설비를 생산하는 라인을 둘러보고 나서 중간 크기의 설비를 생산하는 라인으로 이동하였다. 안내를 맡은 직원이 한 설비 앞에 서서 말했다.


"이 설비에 J기업의 센서류가 들어갑니다. 설비를 정밀 제어를 하는 데 꼭 필요한 기능을 하는 게 센서류죠. 만일 이 설비에 J기업의 센서가 없다면 그냥 쇳덩어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가 김 이사를 쳐다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김 이사는 회사 제품이 먼 유럽까지 와서 생판 모르던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좋았다. 직원들이 각 분야에서 맡은 일을 열심히 수행한 결과가 이렇게 고객으로부터 호평을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던 박 부장이 김 이사에게 부연 설명을 하였다.


"이곳 구매팀장인 줄리아의 역할이 컸습니다. 저희를 적극 돕고 있죠. 앞으로 우리 회사 센서류의 적용 비율이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현장 견학을 마치고 김 이사가 화장실에 들러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박 부장과 줄리아가 복도 끝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재밌는 이야기였는지 줄리아가 깔깔 웃으며 손으로 박 부장의 가슴께를 살짝 치는 모습이 보였다. 박 부장도 활짝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김 이사의 기척을 알아챈 그들은 바로 정색을 하고 떨어졌다. 김 이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였다.




"박 부장, 줄리아와 어떤 사이인가? 두 사람 사이가 다정해 보이던데?"


"그렇던가요? 하하하."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 이사가 묻자 박 부장은 시인도 부인도 않은 채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김 이사가 보기에 아무래도 둘 사이가 거래처 관계로만 머물러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보게. 혹시 둘이 사귀는 사이 아닌가?"


"글쎄 그게 말이죠..."




박 부장이 3년 전 유럽지사에 발령을 받았을 때, 그곳 시장상황이 녹녹지가 않았다. 독일이나 일본 메이커들이 생산하는 정밀 부품들이 고가 시장을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산 제품들이 싼 가격으로 저가 시장을 장악하여 포지션이 어정쩡한 한국산이 설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중국 메이커들은 싼 가격 외에도 리베이트로 고객 담당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어지간한 가격이나 어지간한 품질로는 견적조차 들이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J기업은 회사 정책상 불법적인 리베이트 제공을 허용하고 있지 않아 시장을 개척하는데 어려움이 더 컸다. 그나마 박 부장이 시장개척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사이 K-pop을 비롯한 한국문화가 소개되고 한국차의 판매량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한국산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정도였다.


줄리아가 구매팀장으로 있는 P사는 박 부장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회사 중 한 곳이었다. 폴란드 업체 중 규모가 크고 지명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과 거래가 성사되면 시장 내 파급효과가 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 부장이 몇 차례 방문하여 회사 소개를 하고 견적을 제출하기도 하였으나 거래로 연결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달 그 회사를 방문하여 구매 담당자를 만났다.


박 부장이 만나는 구매 담당자인 올레나는 사십 대 후반의 뚱뚱한 몸매에 수더분한 인상을 한 전형적인 아줌마 스타일의 여자였다. 박 부장은 매달 그녀를 찾아 작은 선물을 건네주며 친분을 쌓아 나갔다. 그녀는 박 부장과 안면을 익히고 나서부터는 그의 방문을 환영하였고, '나에게 매번 선물을 하는 남자는 당신이 유일해요.' 하며 고마워했다. 그녀는 수다 떨기를 좋아해서 박 부장이 방문하면 상담이 끝나고 나서도 시시콜콜한 집안 얘기까지 꺼내놓으며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남편이 엔지니어인데 술과 친구들을 좋아해서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는 일이 잦다는 것. 그래서 자신도 한 번씩 친구들을 만나 놀다가 밤늦게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아들 둘을 낳고 살이 찌고 배가 나오면서부터 부부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 등. 박 부장은 그녀의 사생활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은밀한 이야기까지 늘어놓았고, 그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가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고 난 후 박 부장이 낯선 외국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는 것을 걱정하였다. 그러면 박 부장은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짓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올레나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빨리 자기 회사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회사를 찾은 박 부장이 하얀 보석이 총총 박힌 여성용 머리핀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콜릿 상자를 내밀자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스터 팍, 드디어 기회가 왔어요. 이 부품하고 사양서를 살펴보고 당신 회사에 같은 제품이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무슨 일이죠? 이건 중국회사 제품이네요?"


"맞아요. 거래를 하고 있는 중국회사 것인데 이번에 들어온 것에서 대량 불량이 났지 뭐예요. 지금 회사에 생산 차질이 생겨서 큰일 났어요. 게다가 회장님까지 아시게 되어 노발대발하시며 난리예요. 제가 미스터 팍에게만 특별하게 알려주는 거예요."


박 부장은 그 자리에서 테이블에 놓인 중국산 부품과 사양서 사진을 찍어서 본사 연구소로 보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간단한 설명을 하고 회사 제품 중에 적용가능한 제품이 있는지 급히 알아봐 달라고 하였다.


"올레나, 그런데 당장 필요한 수량이 얼마나 되죠?"


"이번달말까지 80개가 필요해요. 그리고 매달 150개가량 사용하고 있어요."


"예, 알겠어요. 제가 빨리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올레나, 정말 고마워요."


박 부장은 두 손으로 올레나의 통통한 손을 감싸 쥐고 고마움을 표했고, 그녀는 포근한 눈빛으로 박 부장을 보며 미소 지었다.




"미스터 팍,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이번에 고비를 넘겼어요. 그리고 특히 J기업 제품도 아닌데 다른 회사 것까지 알아봐 주는 노력에 정말 놀랐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에요. 당신 같은 직원을 둔 J기업이 부럽군요."


"뭘요, 별말씀을요. 오히려 거래 기회를 준 팀장님께 제가 감사를 드려야죠. 제가 아니더라도 저희 회사 직원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노력했을 겁니다. 저희는 고객이 최우선이거든요. 하하."


한 달 후 박 부장은 P사를 방문하여 줄리아 구매팀장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지난달에 중국산 부품에 품질문제가 생겨 급하게 대체 부품을 찾았을 때, 박 부장이 발 벗고 나서 해결해 준 덕분에 위기를 넘겼었다. 그래서 줄리아가 박 부장에게 그 고마움을 표하는 자리였다.


박 부장이 연구소를 통해 알아보았을 때 다행히도 회사에 적용 가능한 제품이 있었다. 그러나 생산 완료된 재고 수량이 30여 개 밖에 없었고 당장 추가생산을 할 여건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난감했다. 박 부장은 타 회사 제품 중 유사한 모델이 있는지 연구소에 다시 문의를 하였고, 몇 군데를 소개받았다. 박 부장은 본사 영업부서와 자기가 알고 있는 네트워크를 통해서 수배하여 마침내 필요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부품이 항공편으로 공수되어 P사에 납품되었다. 시험결과 한국산 부품이 중국산보다 성능이 우수하였고, 실제로 적용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게다가 중국산과 같은 가격으로 납품되었다. 박 부장은 본사로부터 전략적인 가격을 승인받아 공급하였고, 이후 일 년 뒤부터 정상가격으로 환원하는 것으로 협상을 마무리하였다. J기업이나 P사 모두 윈윈 하는 결과였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박 부장은 오랜 공을 들인 P사와의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며칠 후 박 부장은 줄리아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고마움의 표시로 자기가 저녁을 사겠다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화였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기가 일부러라도 접대자리를 만들어야 했는데, 줄리아가 먼저 연락을 해오다니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금요일 주말 저녁, 근사한 식당에서 둘이 마주 앉았다. 박 부장은 혹시 올레나와 같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줄리아 혼자였다. 그녀가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건넸고, 박 부장은 거래관계를 열어준 데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둘은 맛있는 식사와 와인을 곁들여 느긋한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스럽게 박 부장의 타향살이에 대한 줄리아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폴란드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부장은 '사람 본연의 모습이 중요하지 국적이나 종교, 피부색, 나이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줄리아는 자신이 한번 결혼과 이혼을 겪은 돌싱이라고 하였다. 나이는 마흔 하나. 박 부장보다 두 살 아래였다. 박 부장의 눈에는 그녀가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와인을 마시며 계속되는 대화 속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어서 인지 둘은 서로 묘한 친밀감을 느꼈다. 식사가 끝나자 줄리아가 자리를 옮기지 않겠냐고 제안하였고 박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


박 부장이 줄리아를 따라 들어간 클럽은 대형 나이트클럽과는 다른 약간 고풍스러운 느낌의 아담한 곳이었다. 무대의 단 위에서는 혼성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고 그 아래 플로어에서는 몇몇의 사람들이 몸을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좌석 군데군데에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밴드 연주도 감상하는 등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줄리아가 보드카 잔을 들고 박 부장을 보며 잔을 부딪혀 왔다. 독한 보드카 몇 잔이 들어가자 박 부장은 이내 후끈한 기운을 느꼈다. 볼이 빨갛게 상기된 줄리아가 말했다.


"우리 춤춰요!"


줄리아가 박 부장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이끌었다. 무대에는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남녀 몇 쌍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사이에 박 부장과 줄리아가 손을 맞잡고 섰다. 박 부장이 용기를 내어 그녀를 끌어당기자 그녀가 박 부장의 품에 살포시 안겼다. 그녀의 몸에서 옅은 향이 났다. 그리고 그녀의 탄탄하고 육감적인 가슴의 감촉이 그대로 그에게 전달되었다. 박 부장의 눈 바로 앞에 그녀의 푸른 눈과 오똑한 코 그리고 빨간 입술이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녀의 뜨겁고 감미로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눈을 감았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박 부장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그리고 무대에는 끈적한 색소폰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 이야기는 다음화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련이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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