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사장과 김 이사의 사정

by 이은호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J기업의 유럽지사에 근무하고 있는 박 부장은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과 일본 제품의 높은 인지도와 중국 제품의 저가 공세에 끼여 한국 제품의 입지가 결코 탄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성실함과 연구소 출신답게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된 기술영업으로 시장을 차근차근 개척해 나갔다. 그리고 그의 원만한 대인관계와 친화력이 한몫했다. 거래가 성사되지 않더라도 꾸준히 회사를 방문하여 담당자의 안면을 익히고 친분을 쌓아나갔다. 상대방의 취향을 파악하여 작은 선물을 건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부드럽고 매너 있는 그의 언행에 사람들이 호감을 느꼈다. 그러한 그의 노력 덕분에 P산업과의 거래가 성사되었고, 구매팀장인 줄리아와 개인적인 만남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줄리아는 이혼의 아픔을 겪은 돌싱으로 새로운 남자와의 만남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 부장의 일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와 진정성을 알고 나서는 관심이 생겼다. 특히 구매 담당자인 올레나가 어찌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박 부장 칭찬을 하는지 처음에는 둘 사이에 뭔 일이 있나 하고 의심을 할 정도였다. 그러다 중국 업체로부터 납품받은 부품에 문제가 생겼고, 박 부장이 발 벗고 나서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일이 해결되고 나서 올레나가 한번 만나볼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그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이라고. 동성애자도 아니라고.


둘이 식당에서 만났을 때 줄리아가 '폴란드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박 부장은 '사람 본연의 모습을 보지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답하였다. 줄리아는 그 대답이 좋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뭔가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식당을 나와 클럽으로 자리를 옮기고 둘은 보드카를 마셨다. 줄리아는 오랜만에 실컷 취하고 싶었고 그를 더 알고 싶었다. 박 부장과 춤을 추며 그의 품에 안겨 입맞춤을 했을 때 줄리아는 온몸이 짜르르 저려오는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행복감이요 충만함이었다. 도대체 언제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까마득한 저편에도 그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그 순간 그녀는 생각하였다. '혹시 내 짝이 아닐까?'라고.




J기업에서 인사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 이사는 유럽지사 출장을 마치고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 이사는 다른 출장지에서와는 다르게 공항에 배웅 나온 박 부장과 기분 좋은 인사를 나눌 수가 있었다. 비록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아쉬운 작별이었지만 박 부장은 너무도 적응을 잘하고 있었다. 특히 더 좋았던 건 박 부장의 업무 성과도 성과지만, 그보다도 어쩌면 박 부장이 독신주의자를 벗어나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박 부장은 줄리아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정말 좋은 여자라고, 그녀가 좋다고 하였다.


레드 와인 한잔을 마신 김 이사는 비행기 좌석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미국, 태국, 중국, 폴란드를 거치며 해외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거의 모든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낯선 환경에 적응을 못해서 어려움을 겪고, 외로움에 떨기도 하고 마음의 병을 얻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무 성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들의 희생으로 회사가 성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직원들의 희생으로 성장하는 회사. 그러면 안 될 일이었다. 김 이사는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자기가 뭔가 해야 할 역할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무얼까? 이런저런 생각 끝에 김 이사는 깜빡 잠이 들었고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다다르고 있었다.




"왕년에 내가 말이지..."


그다음 주, 김 이사는 지방에 있는 한 대리점을 방문하여 그곳 사장님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그 대리점의 염 사장은 업력이 30년도 더 된 분으로 J기업의 거의 초창기부터 거래를 해오고 있었는데, J기업의 창업주인 최 회장님과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하였다. 염 사장이 주로 말을 하였고 김 이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초창기에는 J기업의 품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단 말이지. 일본 제품을 국산품으로 대체해야 하는데 애를 많이 먹었어요. 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얻은 정보를 많이 주었지. 거기에 맞춰 최 회장님이 제품 개발을 많이 해주었고. 서로서로 도왔죠. 해서 나도 돈 좀 벌었고. 하하하."


"그러셨군요. 그 당시는 일본산이 거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서 시장개척이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염 사장은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품질이야 일본제품이 좋았지. 그래도 거래처를 하나씩 하나씩 늘려 나가는 게 보람이 있었어요. 최 회장님이 적극 지원해 주었고, 나는 힘을 얻어 부지런히 발로 뛰었고. 거래처 사람들도 많이 도와주었어요. 일종의 사명감이라고 할까, 다들 일본산을 몰아내면서 애국한다고 생각했지. 이제는 J기업 제품이 이쪽 시장을 거의 장악했어요. 가격 성능 품질면에서 손색이 없거든."


"다 사장님 같은 분들이 애써주셨기 때문이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그런데 김 이사님은 인사를 담당한다고 했죠? 난 회사에 대한 애로사항이나 불만은 전혀 없으니까 안심하고, 직원들이나 잘 보살펴 주도록 해요. 내가 조그만 장사를 하지만 그래도 사업이라고 해보니 결국 남는 건 사람입디다. 하하하."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대리점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의 표정이 다 밝아 보였다. 김 이사는 염 사장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직원들에게 잘 대해주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김 이사는 그곳을 나와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차를 출발시킨 김 이사는 배웅 나온 염 사장의 환한 미소를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김 이사가 유럽지사 출장을 마치고 본사에 복귀하여 사장실에 들렸을 때, 결과보고를 듣고 난 사장님이 뜻밖의 지시를 하셨다.


"김 이사, 이번엔 국내에 있는 회사 대리점 몇 곳을 둘러보게. 티브이를 보니까 대기업들이 하청업체나 대리점에 갑질이 심하다는 뉴스가 많이 나오던데, 혹시 우리 회사에서는 그런 일이 없는지 염려되어서 말일세."

"네? 제가요? 그런 일이라면 감사팀이나 고객지원팀에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사담당인 제가 하기에는 좀..."


최 사장은 주춤하는 김 이사를 쳐다보며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구체적인 단서도 없는 상태에서 공식화하기는 뭣하고 또 괜히 영업직원들이 위축될 수도 있고 해서 말이야. 그래서 그냥 조용하게 해달라고 김 이사한테 부탁하는 것이네."


"네, 그런 생각이시라면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지역별로 몇 곳 선택해서 방문하고 다음주말까지 결과보고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김 이사는 회사 제품을 취급하는 대리점들을 둘러보게 되었다. 회사의 영업활동은 대형 거래선은 본사 영업부서에서 직접 거래하고, 그 외 일반 고객들에게는 대리점을 통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대리점은 많은 고객들과 접점에 있는 조직이므로 그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다. 따라서 본사와 대리점간 유대와 협력관계가 회사가 성장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때문에 갑을 간의 갑질이나 횡포가 일어나면 안 될 일이었다. 그걸 걱정하는 사장님 입장을 보아 김 이사는 결코 소홀하게 다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조사를 자신에게 맡긴 게, 사장님이 회사 공식조직을 못 미더워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못 부려먹어 안달이어서 그런 건지 의문이 기는 하였다.


한편 최 사장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김 이사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갑질 문제를 제대로 살펴주기를 바랬지만, 그보다는 김 이사가 사업을 보는 안목을 넓히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인사업무를 맡고 있지만 머지않은 시기에 김 이사에게 관리 업무 전반을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리업무라는 게 책상에 앉아 탁상행정만으로는 안될 일이었다. 사업현장을 알고, 시장상황을 알고, 회사의 물류흐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야 라인조직의 일에 스텝부서가 적극 지원을 하고 필요한 업무 개선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김 이사는 그럴 능력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최 사장은 김 이사를 해외 여러 곳을 둘러보게 하고 아울러 국내 대리점도 둘러보게 한 것이었다.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 고객의 접점부터 살펴라! 그것이 관리업무의 시작이 되어야 할 터였다.



"지금의 경영 스피드로 십 년 뒤에는 J기업이 어떻게 되어있을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 회사가 너무 현재에 안주해 있는 것 같아요. 신제품 개발이 늦어요. 기술 서비스 대응도 늦고요."


김 이사가 다음에 만난 대리점의 장 사장은 김 이사와 비슷한 나이로 다른 사장들보다 비교적 젊은 분이었다. 그분은 J기업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마침 잘 만났다는 식으로 김 이사에게 평소에 품고 있던 불만을 쏟아놓았다. 김 이사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십 년이 아니라 오 년만 지나도 경쟁업체인 Y사에 뒤쳐지기 시작할 겁니다. 내가 듣기로 거기는 벌써 3세대 제품 개발이 완성단계라고 하던데 J기업은 어떻습니까? 잘되고 있는가요?"


사실 회사의 신제품 개발에 대한 사항은 김 이사가 잘 모르는 분야였다. 그래서 김 이사는 장 사장의 물음에 제대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다만 본사에 돌아가 파악을 해보고 회신을 하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장 사장은 J기업과의 거래에 있어서 여러 가지 불편사항과 요구사항을 늘어놓았다. 자칫 잘못 듣기에는 불평불만만 많은 대리점 사장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었으나, 김 이사가 생각하기에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였다. 제일 무서운 게 '잘하고 있다.' '아무 문제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면 개선할 여지가 없고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끊임없는 변화를 꾀해야 하는 경영환경에서, 장 사장의 불평불만은 회사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날의 출장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김 이사는 출장결과 정리를 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다들 회사가 변해야 산다고 하는데 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핵심은 무엇일까? 염 사장은 '직원들을 잘 보살피라'고 하였고, 장 사장은 '신제품 개발이 늦다'고 하였다. 회사가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하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것이 계속 나와야 한다. 그것은 신제품이 될 수도 있고, 고객 맞춤형 서비스가 될 수도 있고, 효율적인 업무 프로세스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발전적인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결론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이사는 생각하였다.


"나의 역할은 직원들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도록 조직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김 이사는 '어떻게 그렇게 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장님도 설득해야 하고 직원들 생각도 바꿔야 한다. 험난한 가시밭길이 될 것이었다.



*이 글은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련이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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