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기업에서 인사업무를 맡고 있는 김 이사는 중국출장을 마치고 회사에 복귀하여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업무 특성상 평소 해외출장이 거의 없었는데, Mr.W 덕분에 먼 미국땅을 다녀왔고 이어서 해외 파견자들의 동태를 살펴보라는 사장님 지시를 받고 태국과 중국을 갔었다. 거기서 만난 본사 파견자들 각자의 사정이 안타까웠고, 덕분에 김 이사는 낯선 잠자리에 더하여 여러 가지 생각들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로도 김 이사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지속되었다. 김 이사는 생각하였다. 직원들에게 회사란 어떤 곳일까? 그냥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 것으로 끝일까? 그 외의 의미는 없는 걸까? 그렇게 보면 하루에서 거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이라는 곳이 너무 삭막한 곳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김 이사는 뭔가가 더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무얼까?
김 이사가 인사업무를 처음 맡았을 때, 직원들의 업무적성을 파악해서 적성에 맞는 보직을 맡기고, 업적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그에 따라 공정한 보상을 하면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해외 파견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나서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편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원들이 일을 하면서 성과를 내는 데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회사에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직원들 탓만 하였다. 회사라는 게 사람이 일을 하는 곳이고 결국 성과는 사람이 내는 것인데, 정작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고 무관심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성과를 내라고 직원들을 다그치기만 하였다. 그 이면에는 많은 직원들이 아파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회사는 직원들의 행복이 안중에도 없는 걸까? 그런 생각들로 김 이사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김 이사, 유럽지사에 가거든 박 부장에게 오더를 주세요. 우리 회사와 관련된 동유럽의 산업동향을 조사할 것과 또 하나 독일의 연구소 현황에 대하여 개략적인 개관을 알아볼 것, 두 가지입니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우리 회사의 미래 먹거리를 위하여 어떤 분야에 집중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기초조사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연구소와의 협력관계를 포함해서요."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김 이사가 갑작스러운 중국출장 때문에 미뤄두었던 유럽지사 출장을 위하여 인사차 사장실을 찾았을 때, 사장님이 뜻밖의 지시를 하셨다.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김 이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사장실을 물러 나왔다. 그것은 자신이 맡고 있는 인사분야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전략담당 부서나 연구소에 지시해야 할 텐데 왜 굳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장님 지시에 이의를 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실 최 사장이 김 이사에게 그런 오더를 내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니 김 이사에게 해외 파견자들에 대한 현안 조사를 시킨 것부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최 사장은 김 이사에게 단순히 해외 파견자들에 대한 현상 파악만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아서 귀로 듣고 자료로만 업무를 보기보다는 직접 방문하여, 인사업무 외에도 해외법인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그곳 시장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회사가 영위하고 있는 사업과 관련하여 어떤 기회와 위협이 있을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안목을 넓혀주고자 했던 것이었다. 최 사장은 김 이사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리고 더욱 성장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김 이사가 열몇 시간의 비행을 거쳐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유럽지사에 근무하는 박 부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박 부장은 김 이사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회사 연구소 출신으로 기술영업을 하던 박 부장이 자신이 맡고 있는 사업에 대한 원가자료를 당시 기획팀장인 김 이사에게 자주 요청하였는데, 김 이사는 단순히 원가자료를 건네주는 것 외에 어떻게 사업을 분석하고 전략을 짤 것인가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둘이 자주 만나게 되었고 술자리도 함께하면서 인간적으로도 친해지게 되었다. 박 부장은 독신주의자였는데, 술자리에서 김 이사가 박 부장으로부터 그 사연을 듣게 되었을 때 무척 안타까웠다. 박 부장이 장래를 약속한 여자친구를 급성 백혈병으로 잃고 나서 연애나 결혼에 대한 꿈을 접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박 부장이 유럽지사로 파견 나갈 때 김 이사는 혹시 환경이 바뀌면 박 부장의 생각도 바뀔지 모른다고 환영하였다. 김 이사가 보기에 박 부장은 혼자 늙어 가기에 너무도 아까운 남자였던 것이다.
"형님, 어서 오십시오. 형님이 여기까지 오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박 부장, 잘 지냈나? 낯선 타국에서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네."
박 부장은 다부진 체격에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고 두 팔을 벌렸고, 김 이사는 거의 일 년 만에 보는 박 부장과 반가운 재회를 하였다. 인사를 나눈 후 박 부장이 캐리어를 건네받아 끌고 김 이사는 그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박 부장이 타는 차는 한국산 SUV였다. 한국 승용차에 대한 인기가 폴란드에서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하였다.
박 부장은 차를 몰아 김 이사가 묵기로 예약되어 있는 호텔로 향했다. 체크인을 마치고 박 부장은 차를 호텔에 주차한 채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김 이사를 안내하였다. 그곳은 박 부장이 몇 차례 가보았던 맛집이었다. 거기서 두 사람은 폴란드 전통만두와 팬케이크 그리고 소시지 등을 곁들인 음식을 와인과 함께 즐기면서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 이사는 음식도 맛이 있었지만 기분이 더욱 좋았던 건 박 부장이 너무나 편해 보였던 것이었다. 적어도 미국이나 태국에서 보았던 파견자들의 아픔 같은 것은 박 부장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박 부장이 경력도 있고 독신주의자로 혼자 살기에 능숙해서인지 외로움이나 우울증 등의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박 부장이 그랬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정말 마음에 든다고, 계속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김 이사는 박 부장에게 사장님의 지시사항을 전달하였다. 바로 동유럽의 산업동향과 독일의 연구소 현황 조사에 대한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박 부장은 문제없다고 하였다. 우선 동유럽 산업동향에 대해서는 평소에 영업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시장조사를 해놓은 것이 있고, 지인을 통하여 산업별로 분석된 보고서도 어렵잖게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박 부장은 독일 연구소에 대하여 말을 이었다. 독일에는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와 응용과학을 연구하는 프라운 호퍼 연구소가 있는데, 막스 플랑크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산실이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우리나라는 국가건 기업이건 당장 상품화하여 돈이 될만한 응용기술에만 열광하기 때문에 기초과학이 무시되고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하였다. 당장 어린아이들부터 창의력보다는 응용력 위주로 공부를 시켜 학년이 올라갈수록 창의력이 떨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기는 한국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울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박 부장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기초과학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독일에서는 기초과학 분야에 정부에서 엄청난 지원을 한다고 하였다. '무엇을 언제까지 할래?' 하고 따지지 않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과학자들을 육성한다고 하였다. 김 이사가 박 부장 말을 들어보니 우리나라가 진정한 과학 선진국이 되기는 정말 요원한 일같이 느껴졌다.
박 부장은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로 기초과학보다는 제품개발과 밀접한 응용기술에 대한 관심이 클 것이기 때문에 응용과학을 연구하는 프라운 호퍼에 대해서 조사하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연구소 산하에 산업별로 특화된 연구조직이 있는데 회사에서 시도해 볼만한 분야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아보겠다고 하였다. 역시 박 부장은 연구소 출신답게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조사방향에 대해서도 술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김 이사는 그런 박 부장이 믿음직해 보였다. 그리고 사장님께서 박 부장에게 그런 오더를 내린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 부장이 독신생활을 접고 결혼을 결심하기까지는 갈길이 먼 것 같아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계를 본 박 부장이 입을 열었다.
"형님, 장시간 비행에 피곤하실 텐데 이제 호텔에 가서 쉬셔야죠. 내일 아침 9시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저와 함께 가실 곳이 있습니다. 주요 거래처 중 한 곳인데 현장 견학을 부탁해 놓았습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저희 회사 제품이 쓰이는 곳도 한번 둘러보셔야지요."
"그래요? 역시 박 부장은 빈틈이 없구먼. 안 그래도 궁금했었는데 잘 되었네. 그러면 내일을 위해서 그만 일어날까?"
둘이 식당을 나왔다. 박 부장이 호텔까지 동행코자 하였으나 김 이사가 만류하였고 박 부장을 억지로 택시에 태워 보냈다. 식당에서 호텔까지 거리도 얼마 안 되고 김 이사는 낯선 이국의 도심거리를 혼자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식당과 호텔은 불과 한 블록 떨어져 있어서 도보로 채 십 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밤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고 한산한 도로를 차들이 여유롭게 달리고 있었다. 김 이사가 발걸음을 옮기며 둘러보니 도로 양옆으로 현대식 빌딩들이 쭉쭉 뻗은 중간에 옛 건물도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런대로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모습이었다. 뚤레뚤레 주위를 살피며 걷고 있는 동양인 남자의 모습이 그곳 사람들이 볼 때는 우스운 모습일 수도 있어 보였다.
"곤방와."
한 오분쯤 걸었을까? 빌딩사이의 골목에서 금발의 여자가 나오며 김 이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빨간 외투에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굽 높은 구두를 신어서인지 키가 거의 김 이사와 비슷하였다. 처음에 김 이사는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알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주위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미? 아임 코리안. 낫 저패니즈."
"오, 쏘리! 아 유 어론? 웨어 유 스테이?"
그녀는 하얀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가슴이 푹 파인 라운드 티를 받쳐 입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가슴이 꽤나 커 보였다. 그리고 제법 미인이었다. 김 이사는 갑작스러운 여자의 접근에 순간적으로 당황하였으나 한편으로 짐작 가는 게 있었다. 김 이사가 대답도 없이 머뭇거리자 그녀의 빨간 입술이 다시 열렸다.
"원 아우어 세븐티 유로. 이프 유 원 쓰리썸 원 헌드레드 써티 유로."
그녀가 자기가 나온 골목 쪽으로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김 이사가 골목 쪽을 보니 거기에 또 다른 여자가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짐작이 맞았다.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김 이사는 그곳을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쓰리썸? 두 여자에게 공격당하면 숨도 못 쉴 것 같다는 상상이 들었다.
"쏘리, 아임 메리드. 마이 와이프 웨잇 미 나우."
김 이사가 손을 휘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그녀는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날리고 몸을 돌려 일행이 기다리는 골목 쪽으로 가버렸다. 까만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그녀의 허벅지와 종아리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
김 이사가 호텔에 다다르자 호텔 근처에도 차림새가 비슷한 젊은 여자들 몇몇이 보였다. 그리고 호텔 로비에도 젊은 여자들이 있었는데, 늦은 시간에 여자들만 거기에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그 여자들도 좀 전에 만났던 여자와 같은 부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비에 앉아있다가 김 이사와 눈이 마주친 한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빨강 머리에 예의 빨간 립스틱을 짙게 바른 모습이었다. 김 이사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르샤바는 참 재밌는 곳이로군!"
* 폴란드 바르샤바 이야기는 다음화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련이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