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기업의 김 이사는 사장님의 명을 받고 칭다오에 있는 중국공장에 와있었다. 명은 사장 조카인 최 차장의 행실에 대하여 파악하는 것. 그리고 중국법인의 정 법인장으로부터 한 달 전에 있었던 최 차장의 여직원 성희롱 사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김 이사는 해당 여직원과의 면담을 통하여 좀 더 정확한 사실 확인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당사자가 한국어 통역업무를 하고 있는 여직원이니 둘이서 대화를 하더라도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김 이사는 해당 여직원과 회의실에서 만났다. 먼저 회사를 대표하여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데 대하여 사과를 하고 사실 확인을 위하여 한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느냐고 양해를 구했다. 특히 본사 사장님께서 크게 우려를 하시고 자신을 직접 보내 알아보라고 하신 점을 강조하였다. 그녀는 김 이사의 정중한 태도에 믿음이 갔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정 법인장에게 최 차장이 사과를 했다며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였다는데 속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때는 법인장 앞이고 앞으로 자신의 회사생활이 어떻게 될지를 몰랐고 특히 최 차장이 본사 사장님의 조카이고 보니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사실은 더 큰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녀가 눈이 벌게져 말했다.
"그날밤 최 차장으로부터 강제로 입맞춤을 당했어요. 호텔 객실 입구에서 갑자기 제 얼굴을 부여잡고 입맞춤을 했죠. 그리고 문을 열고 저를 끌고 들어가려고 하였어요.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으면 저는 꼼짝없이 당했을 거예요."
그녀는 사귀는 남자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날 일어난 일은 말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강제 입맞춤을 당한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김 이사에게 두 번 다시 최 차장 얼굴을 보지 않게 해달라고 울먹였다. 조용히 이야기를 다 들은 김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 이사가 여직원과의 면담을 마치고 사장님께 보고드릴 리포트를 정리하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중국인 관리자 장 팀장이었다. 그는 중국법인의 초창기 멤버로 지금은 어엿한 관리팀장으로 중국공장을 이끌고 있는 직원이었다.
"김 이사님, 이사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을 좀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장 팀장은 서툰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말을 하였다. 하지만 김 이사는 그의 이야기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장 팀장은 그동안 있었던 최 차장에 얽힌 사연을 상세히 알려주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였다. 처음에는 최 차장이 능력도 있는 데다 성실하고 일도 잘하여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몇 번 가진 회식자리에서는 별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서로 편해진 상태에서 가진 술자리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했다. 폭음을 해서 만취한 상태에서 직원들에게 시비를 걸고 젊은 직원에게 손찌검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 최 차장을 보고 모두들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 후로 회식자리에서 직원들에 대한 폭언은 물론 여직원들에 대한 성희롱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전했다.
장 팀장은 최 차장이 술 취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른 지킬과 하이드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처음 한두 번은 이해를 하려고 했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자 직원들 사이에 기피대상 1호가 되어 회식자리에서 서로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피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서 내에 최 차장을 챙겨야 하는 직원들이 있었고 피해를 입는 경우가 나왔다고 했다. 만일 최 차장이 사장 조카만 아니었으면 벌써 무슨 일이 나도 났다고 했다. 중국이라는 곳이 땅덩어리도 넓고 돈만 주면 쉽게 해결해 주는 해결사들도 많아, 누가 손을 써서 일을 벌이고 그곳을 떠나면 못 잡는다고 하였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발생하면 중국법인의 큰 수치가 될 거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최 차장 본인을 위해서라도 중국법인에서의 계속 근무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김 이사는 장 팀장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장 팀장, 이렇게 자세히 알려주어서 고마워요. 해결방안을 찾아볼게요."
장 팀장이 자리를 떠난 후 김 이사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장 팀장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결코 최 차장을 몰아내기 위한 협박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장 팀장이 중국법인의 초창기 멤버로 입사하여 맨땅에서 회사를 함께 일군 사람으로서 회사를 생각하는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김 이사는 최 차장의 성희롱 사건에 대하여 여직원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분위기를 알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듣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 바로 진 대리가 떠올랐다. 김 이사는 진 대리 자리로 전화를 걸어 시간을 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고 손에는 예의 찻잔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김 이사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이사님, 차가 따끈할 때 드세요."
김 이사는 아침에 식은 차를 벌컥벌컥 마셨던 장면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녀도 따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사님, 무슨 일이시죠?"
"진 대리도 최 차장 이야기를 알죠? 여직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듣고 싶어서요."
진 대리가 입을 열었다. 그녀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장 팀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만큼이나 심각하였다. 최 차장의 행실을 여직원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공장에서 같이 근무할 때 성희롱 피해를 입었던 여직원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나마 최 팀장이 판매사무소로 자리를 옮기면서 공론화가 잠시 주춤하였다고 했다. 그러다 한 달 전 다시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는 여직원들 사이에 논쟁이 붙어 굉장히 시끄러웠다고 했다. 회사 측의 미온적인 조치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아 그대로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회사에 실망이 커 직원들이 대규모로 이탈하는 사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잘 알겠어요. 상황이 심각하군요. 내가 본사에 가는 대로 사장님께 보고해서 조치를 취하도록 할게요."
진 대리의 이야기를 들은 김 이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최 차장을 그대로 두는 것은 본인은 물론 중국법인에도 큰 위기가 될 것이 분명하였다. 직원들이 더 이상 동요하고 회사에 대하여 실망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런데 이사님, 제가 이사님을 좋아했다는 걸 아세요?"
김 이사가 무거운 마음으로 향후 진행방향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데 김 이사를 쳐다보던 진 대리가 뜻밖의 고백을 하였다. 김 이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예? 저를 좋아했다고요? 진 대리가요?"
"예, 좋아했다고요."
그녀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이런! 회사 내 성희롱 사건에 대하여 조사를 하고 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김 이사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자칫하면 자신이 또 다른 성희롱 사건에 휘말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허, 이 일을 어쩐다?
"다 지난 일이니까 당황하실 것까지는 없어요, 이사님! 호호호."
얼굴이 붉어지고 당황한 빛이 역력한 김 이사의 모습을 보고 진 대리가 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그녀가 한국 본사에 출장을 갔을 때 기획팀장으로 있던 김 이사에게 첫눈에 호감이 갔다고 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고 하였다. 팀원들과 같이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직접 고기를 구워 먹기 좋게 잘라 자신의 접시에 올려주는 세심함에 반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볼 때마다 미소를 짓는 김 이사의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고 하였다. 교육을 마치고 귀국할 때 김 이사가 선물로 건넸던 화장품 세트가 너무 소중해 차마 사용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때 화장품 세트를 무슨 뜻으로 주었느냐고 물었다.
김 이사는 당황하였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얼버무렸다. 사장님으로부터 갑작스러운 명을 받고 성희롱 사건 조사차 방문한 중국공장에서 현지 여직원에게 사랑고백을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때 팀장님은 제 사랑이었어요.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는데 어제 이사님을 뵙고 잠시 옛 생각에 잠겼네요. 오늘 이렇게라도 제 마음을 털어놓게 되어 너무 후련해요."
"허..."
그녀는 당돌하였고 김 이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다 털어놓고 속이 후련할지 몰라도 김 이사는 아니었다. 당장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얼굴을 마주 보는 것도 어려워졌다. 그녀를 괜히 찾았다 싶었다. 김 이사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제는 다 잊었으니 안심하세요, 이사님. 전 이미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걸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호호호."
"아!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늦게나마 결혼 축하해요."
비로소 김 이사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참 남녀 간의 감정이라는 게 묘했다. 김 이사는 진 대리와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국적도 다르고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았는데,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그리고 다시 만난 자리에서 고백을 들었다. 물론 다 지난 일이고 지금은 마음을 잡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하니까 천만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김 이사는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렸다. 앞으로 어디서건 마음가짐이나 행동거지를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생기면 정말 안 될 일이었다.
면담을 다 마친 진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이사님, 또 언제 뵐지 모르겠는데 일 다 보시고 귀국 잘하세요. 그리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요. 진 대리도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길 빌게요."
김 이사가 손을 내밀어 진 대리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녀의 손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악수를 마치고 그녀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가져온 찻잔을 챙겨 회의실을 나갔다. 그녀가 떠난 뒤 김 이사는 멍하니 서있다가 뭔가 생각난 듯 서둘러 짐을 챙겨 회사를 빠져나왔다.
* 이야기가 길어져 또 다음회로 넘깁니다. 다음회에서 기필코 김 이사의 중국출장 이야기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 이 글은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련이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