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기업에서 인사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 이사는 태국지사의 박 과장과 헤어진 늦은 시각 전화를 받았다. 바로 사장님 전화였다. 무슨 일일까? 이 시각에 사장님께서 직접 전화를 하신 이유가?
"김 이사, 일정을 조정해서 바로 칭다오로 가보게. 거기 최 차장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 모양인데 가서 철저히 조사를 해주게."
"최 차장이요? 예, 알겠습니다."
김 이사는 다음날 방콕을 떠나 폴란드 바르샤바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거기에 동유럽시장을 겨냥한 회사 유럽지사가 있었는데 그곳을 방문하여 점검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사장님 전화를 받았고 일정을 변경하여 중국 칭다오로 넘어가게 되었다.
칭다오에는 시내에 회사 판매사무소가 있고 시 외곽에 제법 규모가 큰 제조공장이 있었다. 사장님이 말한 최 차장은 공장에 근무하다가 얼마 전 판매사무소로 옮긴 직원이었다. 사장의 조카인 최 차장은 학교 졸업 후 벤처기업에 잠시 근무하다 대리로 입사하여 부서를 옮겨 다니며 실무경험을 쌓고 있는 중이었다. 백이 든든한 최 차장은 남들보다 일 년씩 단축하여 진급을 하였다. 사장님은 향후 중국에서의 사업확장을 고려하여 해외근무 경험을 쌓으라고 최 차장을 중국으로 보냈고 나름 착실하게 근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 사업을 하며 J기업의 중국공장과 거래관계가 있는 지인을 만났는데 그 지인으로부터 최 차장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김 이사는 그런 일이 있었으면 감사팀을 보내야 할 텐데 왜 굳이 다른 일정을 수행 중인 자신에게 그 일을 시키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공식적으로 알려지면 안 되는 사정이라도 있나 생각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 이사가 칭다오 공항에 도착하자 뜻밖에도 중국법인의 법인장을 맡고 있는 정 이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김 이사가 정 법인장의 손을 반갑게 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바쁘신 법인장께서 어떻게 직접 나오셨나? 차만 보내주면 되는데."
"김 이사가 온다는데 그럴 수 있나? 내가 직접 모셔야지. 하하."
정 법인장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 법인장은 김 이사와 입사동기였다. 중국어를 전공하였고 영업능력이 뛰어난 정 법인장은 중국법인을 맡아 실력을 발휘하여 중국에서 한창 성과를 내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공항에서 한 시간여를 달려 공장에 도착하였다. 김 이사가 오랜만에 다시 방문한 공장은 겉모습부터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공장 한 동이 더 증축되었고 사무동도 새 단장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과 현지인 관리자들과 인사를 나눈 김 이사는 정 법인장의 안내를 받아 현장을 둘러보았다. 깨끗하게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고 활기가 넘쳐 보였다. 눈에 보이는 모습만 봐도 중국 사업이 잘되고 있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법인장이 애를 많이 썼네. 공장이 잘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아. 직원들 표정도 밝고."
"다 직원들이 열심히 해주는 덕분이지. 나야 뭐 딱히 할 게 없더라고."
김 이사의 칭찬에 정 법인장이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그 모습 뒤로는 어떤 자부심 같은 게 느껴졌다. 김 이사는 그런 입사동기가 멋지게 보였다.
"정 법인장, 그런데 최 차장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무슨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날 저녁 시내에서 둘이 함께한 식사자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김 이사가 정 법인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정 법인장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고 긴장한 표정이 돌았다.
"내가 들은 말이 있으니 최 차장에 대하여 아는 대로 털어놓게."
"자네가 그 일 때문에 왔구먼. 사실은 말일세..."
뜸을 들이던 정 법인장이 입을 열었다. 최 차장은 성실하고 일을 잘하는 친구였다. 학벌도 스펙도 괜찮은 그가 사장의 조카라는 내색도 전혀 없이 남들이 꺼리는 힘든 일에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적극성을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장 조카라는 타이틀을 떼더라도 백 점짜리 직원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술을 마시고 취하고 나면 사람이 180° 바뀌는 것이었다. 때로는 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발정 난 수컷 고양이가 되기도 하였다. 본인도 자신의 그런 주사를 알기에 최대한 술을 자제하려고 하였으나 한 번씩 도를 넘어서면 여지없이 본색을 드러내곤 하였다. 정 법인장도 그런 최 차장을 몇 차례 주의를 주었는데 주사라는 게 한번 발동이 걸리면 본인도 제어가 안되는지라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정 법인장은 최 차장이 사장 조카인데다 평소에는 정말 멀쩡하고 성실한 직원이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제 공장이 아닌 판매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어 접촉이 뜸한데 위안을 삼고 지냈다.
한 달 전쯤에 일이 있었다. 최 차장이 중국의 거래선 하고 접대자리를 가졌는데 거기에 공장에 근무하는 현지인 여직원이 통역으로 참석하였다. 거래선의 공장견학과 상담이 끝나고 이어진 식사자리에 공장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자리를 같이하였다. 최 차장은 처음에는 술을 자제하려고 하였으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술자리에서 술을 호탕하게 마시는 걸 좋아했고 더구나 접대하는 측에서 상대방이 권하는 술을 사양한다는 것은 큰 실례가 되는 일이기도 했다. 결국 최 차장은 한잔 두잔 마신 술이 선을 넘었고 나중에는 스스로 술병을 들고 돌아다니며 주거니 받거니 하여 크게 취하고 말았다. 조금씩 과격해지는 최 차장의 모습이 아슬아슬해질 때쯤 다행스럽게도 술자리가 마무리되어 거기서는 별일이 없었다.
통역을 담당한 여직원이 술에 취한 최 차장을 호텔로 안내했는데 거기서 일이 터졌다. 최 차장이 걱정이 되어 객실까지 무사히 잘 들어가는지 따라나선 여직원을, 그가 같이 자자며 부둥켜안고 객실로 끌고 들어가려고 한 것이었다. 그 여직원은 깜짝 놀라서 뿌리쳤으나 술에 취해 막무가내인 남자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는데 마침 통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어 그 모습을 보았고, 최 차장이 주춤한 사이 여직원은 위기를 모면하고 호텔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음날 정 법인장이 현지인 관리자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 듣고 해당 여직원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여직원은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 팔목에 새겨진 멍자국을 보여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최 차장이 평소에는 멀쩡한 사람인 것을 알기에 따로 처벌은 원치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침에 최 차장으로부터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정 법인장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달라고 요구하였다.
"일단은 최 차장에게 공장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지시를 해놓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네. 그쪽 사무소에도 여직원들이 있고 말이야."
"어허, 그런 일이 있었군. 내가 내일 직원들에게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네."
"그런데 사장님이 어떻게 아셨을까? 큰일 났군!"
"세상에 비밀이 있나? 잘 수습해 봐야지."
김 이사는 마지막 잔을 비우고 정 법인장과 헤어져 예약해 둔 호텔로 향했다. 체크인을 하고 키를 받아 들고 복도를 지나 배정받은 객실에 도착하여 문을 여는데 복도에서 실랑이하는 최 차장과 여직원의 모습이 그려졌다. '에이구! 술이 웬수지.' 김 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날 아침 김 이사가 공장에 출근하여 정 법인장을 비롯한 간부 직원들이 회의를 하는 사이 혼자 응접실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한 여직원이 찻잔을 들고 들어왔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거 아주 맛있는 차인데 한번 드셔보세요."
"어? 진 대리,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그 여직원은 회계팀에서 관리회계 담당으로 근무하는 조선족 직원이었는데, 김 이사가 기획팀장으로 근무할 때 본사로 출장을 와서 회사의 관리시스템에 대해서 배우고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김 이사가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식사도 같이 하고 한국이 초행길인 그녀를 잘 보살펴 주도록 직원들에게 당부도 하였었다. 그녀가 김 이사 옆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이사님 오신 김에 좀 알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이 괜찮으신가요?"
"예, 한 시간 정도는 괜찮은데 무슨 일이죠?"
그녀는 중국법인의 사업별 결산 자료를 꺼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분석하여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이야기하였고 김 이사의 의견을 물었다. 김 이사는 이제 그쪽 업무를 담당하지 않았지만 기획팀장을 맡고 있었을 때 회사 관리체계를 수립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자신 있는 분야이기도 하였다. 김 이사는 한 시간을 훌쩍 넘기며 진 대리와 의견을 나누었고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을 바로 잡아주었다. 그녀는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김 이사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김 이사의 눈에는 자기가 맡은 업무에 애착을 갖고 깊이를 더해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기특하고 예쁘게 보였다. 김 이사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눈이 마주친 그녀가 김 이사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김 이사는 순간 당황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험험!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들고 온 찻잔이 눈에 들어왔다. 김 이사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는 떫고 쓴 맛만 느껴졌다.
"차가 아주 맛있네요."
김 이사는 딴청을 피웠고 그녀는 미소를 띤 채 김 이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 이야기가 길어져 다음회로 넘깁니다. 거의 단편소설 정도의 분량이라서요.^^
* 이 글은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련이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