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아파요

by 이은호



J기업에서 인사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 이사는 미국출장을 마치고 회사에 출근하여 사장실을 찾았다. 김 이사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따끈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신 사장님이 입을 열었다.


"보내준 메일을 보고 출장 결과는 확인을 했고, 그래 Mr.W와 다른 일은 없었나요?"


사장님의 물음에 김 이사는 잠시 망설였다. W의 좋지 않았던 언행을 일러바치려다, 이미 다 끝난 일이고 괜히 말해봤자 그런 놈을 뽑은 사장님 마음만 아프게 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주재원으로 나가 있는 조 대리의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능력 있는 외국인 관리자를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직원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김 이사는 조 대리가 우울증에 시달렸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홈쇼핑에 목숨 걸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사장님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회사가 직원한테 정말 소홀했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른 곳에 파견 나가 있는 직원들은 어떤지 전체적으로 점검을 해주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전체적으로 확인해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바로 출장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김 이사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고 사장실을 물러나왔다. 그리고 미국출장의 여독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태국 방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방콕의 수안나품 국제공항에 내린 김 이사를 맞아주는 것은 후끈한 열기와 동남아 특유의 약간 시큰한 느낌의 냄새였다. 그러나 김 이사에게는 맑고 깨끗했던 피닉스의 공기보다 방콕의 느낌이 훨씬 정겹고 푸근하게 다가왔다. 김 이사는 이번이 두 번째 태국 방문이었다. 지난번에는 가족과 여행을 온 것이었지만 이번은 출장이었다. 일정도 빡빡해서 여유를 즐길 시간도 없었다. 덩달아 마음도 바빠졌다.


태국지사에는 본사에서 나온 주재원 한 명이 현지인 세 명과 근무를 하고 있었다. 주 업무는 영업활동. 그간 몇 년간은 매년 성장을 하였었는데 작년 하반기부터 실적이 떨어졌다. 주 거래선 한 곳에 클레임이 발생하였고 일본 경쟁업체의 공격적인 마케팅이 있었다. 아마도 주재원인 박 과장의 마음고생이 심하지 싶었다. 이 정도가 김 이사가 출장 전에 파악한 태국지사의 최근 현황이었다.


박 과장은 파견 전에 서울 영업본부에 근무하였는데 김 이사와는 별 다른 접촉이 없는 사이였다. 그러다 박 과장이 회계팀에 근무하는 여직원과 사귀었는데, 이 여직원이 김 이사가 기획팀장으로 근무할 때 팀원으로 있던 여직원과 단짝 친구였다. 기획팀 회식 때 그 회계팀 여직원이 친구 따라서 몇 번 참석하였는데, 김 이사는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그 여직원을 좋게 보았다. 이후 박 과장과 그 여직원이 결혼을 하였고 김 이사는 그런 연유로 박 과장을 눈여겨봐 왔었다.




"이사님,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박 과장, 오랜만이네요. 더운 나라에서 고생이 많지요?"


180cm가 넘는 키에 듬직한 체구의 박 과장이 까맣게 탄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김 이사를 맞았다. 김 이사는 반갑게 박 과장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하얗고 조그만 김 이사의 손이 까맣고 두툼한 박 과장의 손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이사님,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이렇게 갑자기 이사님께서 직접 나오시다니 말입니다."


"하하. 잘못한 게 있으면 감사팀에서 오지 내가 오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사무실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박 과장이 긴장하며 물었고, 김 이사는 그런 박 과장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안심을 시켰다. 거리에는 오토바이가 꽤 많았다. 차량과 오토바이 그리고 젊은이들. 방콕 시내는 활기가 넘쳤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현지인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김 이사는 여직원이 타 준 아이스커피를 들고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회사 제품이 전시된 쇼룸, 회의실 그리고 직원들이 일하는 사무실이 전부였다. 쇼룸에 전시된 샘플들을 보니 제작한 지가 좀 오래된 듯 보였고 최근에 나온 신제품들은 보이질 않았다. 김 이사가 박 과장에게 물으니 안 그래도 본사에 요청을 해놓았고 제작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하였다. 아울러 카탈로그와 판촉물들도 새로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이사는 고급 식당에서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다. 그래도 본사에서 임원이라고 왔는데 현지직원들에게 밥 한 끼는 사주며 위로를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덕분에 김 이사도 매콤한 해물요리를 비롯한 맛있는 태국요리를 맘껏 즐겼다. 짜기만 짜고 맛도 없었던 미국 스테이크보다 열 배 스무 배는 좋았다. 목을 시원하게 뻥 뚫어주는 싱하맥주도 훌륭하였다. 그래 이게 사람이 먹는 음식이지 싶었다. 현지인 직원들도 맛있게 먹었고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였다. 식사를 마친 후 김 이사는 면세점에서 사 온 작은 초콜릿 상자를 현지인 직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헤어졌다.


박 과장은 김 이사를 미리 예약해 둔 호텔로 안내하였다. 체크인을 한 후 김 이사는 박 과장과의 면담을 위해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조용한 와인바로 자리를 옮겼다. 박 과장의 속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딱딱한 사무실보다는 술집을 선택한 것이었다.


"박 과장, 아이가 있죠? 잘 자라고 있나요? 아빠를 닮았으면 우량아일 테고 엄마를 닮았으면 예쁠 텐데."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김 이사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박 과장이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김 이사는 깜짝 놀랐다. 혹시 뭘 잘못했나? 아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김 이사가 눈치를 살피는데 박 과장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네, 잘 크고 있습니다. 이사님께서 아이 이야기를 하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죄송합니다."


"허, 내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 박 과장 향수를 자극했네요."


"아닙니다, 이사님. 제 아들이 이제 두 돌이 지났는데요 슬프게도 아빠를 잘 못 알아봅니다. 겨우 반년에 한 번씩 보니까요. 그리고 일주일 동안 같이 있으면서 얼굴을 익힐 때쯤 되면 또 헤어지고. 그런 아들 모습이 떠올라서..."


그랬다. 회사가 신혼부부를 이산가족을 만들어 놓고 아이에게서 아빠 얼굴을 지워버렸다. 김 이사는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도대체 회사라는 게 뭔지.




김 이사는 박 과장의 잔에 와인을 채워주고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박 과장이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태국지사에 파견 나와 3년 차를 맞은 박 과장은 회사 실적도 개선되고 거래처도 늘어나면서 안정적인 사무실 운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장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본 경쟁업체에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면서 위기를 맞았다. 거의 매일 먼 거리에 있는 거래선들을 방문하여 고객들을 다독이며 방어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주요 거래선 한 곳에 대형 클레임이 발생하고 말았다. 당연히 박 과장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 본사 기술팀과 생산팀과의 업무처리 과정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클레임이 났다는 소문이 업계에 퍼져나갔고 회사의 신뢰도가 크게 망가졌다. 태국지사의 매출이 뚝뚝 떨어졌다. 박 과장은 그 일을 수습하고 잃었던 신뢰관계를 만회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이런저런 생각과 걱정에 밤에 잠을 못 이루고 시도 때도 없이 두통에 시달렸다. 이런 와중에 또 무슨 일이 터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늘 긴장 속에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벌어진 일을 어느 정도 수습한 박 과장은 미뤄둔 휴가를 받아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다다를 때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가슴이 쥐어짜듯이 아파왔다. 머리에 땡! 하는 울림이 왔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로 자신의 부친이 몇 년 전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마침 박 과장의 기색을 눈치챈 승무원이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종이봉투를 입에 대고 천천히 숨을 쉬라고 하였다. 그리고 좌석을 뒤로 젖히고 허리띠를 풀어 몸을 느슨하게 해 주었다. 비로소 박 과장은 한결 나아지는 걸 느끼며 안도하였다. 승무원이 건네주는 생수가 달게 느껴졌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박 과장은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검진을 받았다. 각종 검사에 MRI까지 찍었다. 우려와는 달리 이상이 없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의사는 정신의학과 진료를 받아보라고 권하였다. 박 과장은 다시 정신의학과를 찾았다. 거기서 상담을 받고 설문지 검사를 끝낸 박 과장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 우울증이라니? 활발한 성격의 박 과장으로서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결과였다. '내가 우울증이라니!' 박 과장은 정신과 약을 받아 들고 병원문을 나섰다. 그동안 신혼임에도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야 했던 시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업무 스트레스, 성과부진에 대한 책임감. 그에 따른 불면증과 두통. 이런 것들이 박 과장의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와이프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사님께 처음 말씀드리는 겁니다."


박 과장이 와인 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 박 과장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김 이사가 입을 열었다.


"박 과장, 내가 미안하네. 회사에서는 아무것도 몰랐어. 직원들을 타국에 내보내고 성과 내라고 닦달만 했지 직원들이 어떤 고생을 하고 있는지는 관심조차 없었어. 정말 미안하네. 그래 회사에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던 겐가?"


"그건 아니고요, 이사님. 다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인걸요. 그리고 이제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하."


박 과장의 말이 김 이사를 더 속상하게 하였다. 타국에서 혼자 고생하며 열심히 근무하는 직원들. 마음에 병이 들어가면서도 다 자신이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회사 어느 누구한테도 불평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묵묵히 참아내는 직원들. 과연 그들에게 회사는 어떤 존재일까? 그리고 회사는 그들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걸까? 이건 아니었다. 김 이사는 해외 파견직원에 대한 처우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아마도 이런 사정을 아시면 사장님께서도 흔쾌히 들어주실 것 같았다.


"박 과장, 조금만 더 참게. 내가 조만간 좋은 소식을 전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이사님. 와이프가 이사님이 참 좋은 분이라고 하더니 이사님은 정말 사람을 이해해 줄줄 아는 분입니다."


김 이사가 와인 잔을 들고 박 과장의 잔에 살짝 부딪혔다. 박 과장이 와인 잔을 들고 씩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와인 잔에 노란 조명빛이 떨어져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 휴가 때 박 과장은 가족을 동반하여 태국 현지로 복귀하였다. 이제는 더 이상 아이가 아빠 얼굴을 잊었다가 다시 기억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회사에서 넉넉한 크기의 사택을 임차해 주었고 별도로 가족수당까지 지급하였다. 어린아이를 위한 현지 의료비 혜택도 지원하였다. 박 과장은 태국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제2의 신혼생활을 알콩달콩 보냈고 그다음 해 둘째를 보았다. 엄마를 닮은 예쁜 딸이었다.



* 이 글은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련이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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