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대리, 이게 다 뭡니까? 혹시 투잡이라도 하나요?"
J기업에서 인사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 이사는 미국에 출장 와서 미주법인장 Mr.W의 퇴사 관련 업무를 마친 다음날 오전 조 대리의 숙소에 잠시 들렀다. 회사에서 파견 보낸 직원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조 대리의 숙소에 들린 김 이사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법 넓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침실을 갖춘 빌라였는데, 집안 곳곳에 크고 작은 상자와 온갖 물건들이 가득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닙니다. 투잡이라뇨? 그냥 티브이 홈쇼핑에서 구매한 것들입니다."
조 대리는 당황하여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하였다.
"홈쇼핑요? 아니 혼자 사는 사람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많이 필요하지요?"
김 이사가 천천히 둘러보니 꽃무늬 커피잔을 비롯한 각종 그릇에서부터 쿠킹기구들, 세탁용 세제 및 청소도구들, DIY용 공구류, 전지가위 등 정원관리용 도구들, 캠핑용품에다가 운동기구, 골프클럽까지. 어림잡아도 2백 여종은 넘을 만큼 방대한 양으로 웬만한 잡화상 한 곳을 털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들어올 때 현관 밖에 쌓여있던 정체 모를 박스들이 생각났다.
"허, 이거 해명을 들어봐야 하겠는데요?"
"그..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조 대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 대리가 미주법인으로 파견을 나왔을 때는 사무실이 LA에 있었다. 조 대리는 비록 부모 곁을 떠나 처음으로 낯선 외국에서 홀로 지내는 것이었지만, 머지않은 곳에 한인타운도 있었고 번화가에 보고 듣고 즐길거리가 많아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게다가 한 모임에서 교포 2세 아가씨를 만나 알콩달콩 연애도 하며 LA라는 도시에 한창 정을 붙이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Mr.W라는 백인이 법인장으로 입사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는 사무실이 LA에서 피닉스로 이전을 한 것이었다. 덕분에 직원 여덟 명 중 사정이 안 되는 절반이 회사를 그만두었고 네 명만 피닉스로 따라나섰다.
미주법인의 새 사무실은 피닉스의 다운타운에서 한참 떨어진, 은퇴자들이 노후를 즐기는 휴양시설이 잘 갖춰진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저녁 6시만 되면 상점이 문을 닫고 길거리에 인적이 끊어지는 곳이었다. 졸지에 여자친구와 생이별을 하게 된 조 대리는 주말에 LA와 피닉스를 비행기로 오가며 장거리 데이트를 하였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고 말았다. 사소한 의견충돌과 말다툼이 몇 번 있었는데 장거리 연애에 지친 피로감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자친구와 헤어진 조 대리는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고 괴로움의 시간을 보냈다.
새로 자리를 잡은 동네는 죄다 나이 든 노인들뿐이고 변변한 아가씨들이 없는 곳이었다. 호텔이나 휴양시설에서 근무하는 여자들도 대부분 아줌마들이거나 몸집이 산만한 흑인여자들이었다. 두툼한 어깨에 커다란 가슴 그리고 튀어나온 배와 엉덩이. 까만 피부의 그녀들은 마치 한 마리 버팔로 같았다. 가끔 젊은 백인여자나 히스패닉계 아가씨가 눈에 띄기도 했지만 몸집은 거의 비슷하였다. 피부색만 다를 뿐. 자칫 시비라도 붙어 그 큰 가슴이나 거대한 엉덩이에 깔리면 바로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조 대리는 그곳에서 다시 여자친구를 사귄다는 꿈을 접어야만 했다.
조 대리는 보통 오후 5시쯤 퇴근해서 간단하게 밥을 챙겨 먹고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켰다. 습관적으로 맥주캔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비스킷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오물거렸다. 그리고 다시 맥주캔을 집어 들며 리모컨으로 티브이 채널을 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전체 티브이 채널이 세 바퀴를 돌았다. 티브이 채널 돌리는 것 말고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만날 사람도 없었고 즐길거리도 없었다. 낮에 사무실에서는 동료들과 대화라도 나눴지만 퇴근 후 숙소에 오면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완전 독방 감옥살이 하는 거와 똑같았다. 그러는 조 대리의 뺨을 타고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하루에 30분만 투자하세요. 당신의 몸에 활력을 주세요. 일주일만 투자하시면 확 달라질 겁니다!"
어느 날 젊고 날씬한 금발의 여자가 몸의 윤곽이 다 드러나는 탱크톱에 레깅스를 입고 조 대리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녀 뒤로는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젊은 남녀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홈트레이닝 운동기구를 파는 홈쇼핑 방송이었다. 그녀는 '저에게 빨리 연락 주세요!' 하는 은근한 눈빛을 조 대리에게 보내고 있었다. 넉을 잃고 바라보던 조 대리는 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나는 누굴까?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뭘 하고 있지? 그게 의미가 있기는 한 건가? 조 대리의 마음에 우울이 밀려오고 그게 깊어질 때쯤 조 대리를 건져 올린 게 바로 티브이 홈쇼핑이었다. 젊고 섹시한 여자가 조 대리와 함께 운동도 하고 요리도 하고 멋진 곳으로 캠핑을 가서 함께 불멍을 하기도 했다. 정원도 함께 가꾸고 아이들과 장난감을 갖고 함께 놀아주기도 하였다. 조 대리는 홈쇼핑 채널을 보는 시간만큼은 절대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조 대리 숙소에는 하나둘씩 물건이 늘어났고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고생이 많았네요."
이야기를 듣고 난 김 이사는 회사가 조 대리한테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 대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요즘은 골프에 빠져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조 대리는 홈쇼핑의 그녀 덕분에 우울한 마음을 한꺼풀 털어버리고 평일에는 짐(gym)에 가서 몸을 만들고 주말에는 골프장에 간다고 하였다. 한동안은 짐에서 자신의 몸보다 두 배는 큰 거구들이 근육 만드는 모습을 보고 따라 했는데, 그러다가 자칫하면 골병들겠다 싶어 포기하고 이제는 몸만 푼다고 하였다. 대신에 주말에 입장료 49불을 내고 퍼블릭 코스에서 직접 골프백 끌고 다니며 골프를 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것도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였다. 혼자서 골프백 끌고 걸으면서 때로는 공 두 개씩 놓고 샷을 날리는. 옆에서 '나이스샷!' 해주는 사람도 없고, 버디를 잡아도 하이파이브해 줄 사람도 없는.
김 이사는 생각했다. 골프는 그래도 일행과 함께 티샷 날리고 전동 카트 타고 달리며 시원한 바람도 쐬고, 그늘집에서 맥주도 한 캔 마시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뙤약볕 밑에서 혼자 골프채 끌고 다니며 하는 골프가 중노동이지 무슨 재미가 있겠나 싶었다.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잇는 조 대리가 애처로워 보였다. 조 대리는 한 번씩 공에 사람 얼굴을 띄워 놓고 분노의 샷을 날린다고 하였다. 김 이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 얼굴의 주인공이 사장님은 아니기를 빌었다.
"저기가 김병현 선수가 공을 던졌던 다이아몬드백스 구장입니다."
다운타운으로 가는 차 안에서 조 대리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야구장과 주위를 둘러싼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김병현 선수는 이 낯선 땅에서 거구의 선수들을 상대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공을 던졌을까? 그도 외로움을 떨쳐내며 한구 한구 분노의 투구를 했을까? 그래서 공이 그렇게 미친 듯이 흔들리며 들어갔던 것일까? 김 이사가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에 차는 빠르게 달려 다운타운에 있는 한 건물에 다다랐다. 로펌이 있는 곳이었다. 조 대리 업무로 대리점 계약서를 준비하는 일이었는데 현지 변호사의 자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둘이 응접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변호사가 와서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금테 안경에 좀 깐깐해 보이는 백인 남자였다.
"자, 이제 시작할까요? 지금부터 타임차지에 들어갑니다."
남자가 말을 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타임워치를 눌렀다. 조 대리 말로는 시간당 329불이라고 하였다. 조 대리는 비용절감을 위해 미리 서류를 메일로 보내놓았고 사전 검토를 마친 변호사와 상담을 이어 나갔다. 김 이사 생각에 미주법인장이었던 Mr.W와는 다르게 미국 변호사들은 시간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 같았다.
할 일이 없는 김 이사는, 사실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창문을 통하여 거리 풍경을 감상하였다. 그러고 보니 피닉스는 날씨도 맑고 따뜻했고 공기도 좋았다. 공장지대에 있는 한국 본사와 달리 하얀 셔츠를 삼일 동안 입었는데도 카라가 깨끗하였다. 눈을 들어보니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둥실둥실 떠서 흘러가는 게 보였다.
김 이사는 피닉스에서 LA를 거쳐 한국으로 가는 밤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또다시 시작되는 장시간의 비행. 시차적응이 힘들어 사흘 내내 비몽사몽 했었다. 레드와인을 한잔 한 김 이사는 좌석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이사님, 본사 복귀 발령을 내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
피닉스 공항에서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눈시울을 붉히던 조 대리 얼굴이 떠올랐다.
* 이 글은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련이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