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미주법인장이 회사에 올 때 회사 사업분석 프로세스에 대한 자문을 받아야겠습니다. PT 자료를 준비해 주십시오."
J기업의 기획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 부장은 어느 날 사장님으로부터 그런 지시를 받았다. 그 미주법인장은 Ivy League 출신에 미국 유수기업의 세일즈 경력을 가진 백인이었는데, 몇 개월 전 사장님께서 미국에 출장을 가셔서 심혈을 기울여 뽑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J기업에서 법인 책임자로는 처음으로 채용한 외국인이었다. 사장님이 김 부장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분은 단순히 미주법인의 책임자가 아닙니다. 본사 이사회 멤버 정도로 대우를 해야 할 사람입니다."
김 부장은 그 한마디만 들어도 사장님이 그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있는지 짐작이 되었다. 사장님은 그가 앞으로 미주시장에서 회사 제품의 판로를 크게 개척해 줄 적임자로 신뢰하고 있었고 나아가 회사를 한 단계 성장시켜 줄 인재로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그런 대단한 분한테 회사 사업분석 프로세스를 설명하고 선진 노하우를 전수받을 기회라고 생각하니 김 부장은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기도 했다. 영어실력이 미천한 그가 원어민 앞에서 영어로 PT를 해야 한다니, 아아~ 그 부담감이란!
김 부장은 모자라는 실력에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며 영어로 PT 자료를 만들었다. 그리고 해외영업팀 직원에게 어색한 영어표현이 없는지 검토를 받아가며 자료를 완성하였다.
마침내 D day가 되었다. 오전 10시 반경 사장 비서로부터 연락을 받은 김 부장은 잔뜩 긴장을 하고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사장님과 이사회 의장이기도 한 경영고문님 그리고 희고 붉은 얼굴에 어깨가 떡 벌어진 다부진 체격의 백인 남자가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시작된 회의. 김 부장은 PT 자료를 열고 떠듬떠듬 영어로 발표를 하였다. 미주법인장인 Mr.W가 중간중간 질문을 하였는데, 김 부장은 혀에 버터를 잔뜩 발라놓고 굴려대는 W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난감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런데 그 사이의 절차가 어떻게 되는 거지요?"
다행스럽게도 김 부장의 영어실력을 익히 아시는 사장님이 직접 나서서 통역을 해주었다. 그래서 김 부장이 설명을 하면 다시 사장님과 W가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고 다시 김 부장이 발표를 이어가는 이상한 흐름의 회의가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김 부장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김 부장의 눈에 영 거슬리는 광경이 있었는데 바로 W의 태도였다.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로 꼬고 앉아 엉덩이를 의자 끝에 걸친 채 상체를 뒤로 눕혀 거의 반쯤 누운 자세로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것이다. 김 부장이 뭐 유교식 예절을 숭배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W의 태도가 영 못마땅하였다. 그게 서양식 예절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여기는 한국이고 자신의 상사인 사장님이 있는 자리인데, '뭐 저런 싸가지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W의 자세는 더 흐트러졌고 거의 드러눕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식 예절에 익숙해서인지 사장님과 고문님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고 김 부장 혼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점심시간이 다 되어 회의가 끝났다. 김 부장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회의실을 나와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리고 회의가 무사히 끝난 것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정작 선진 경영노하우를 기대했던 김 부장은 단 한마디도 참고가 될만한 아이디어를 얻지 못하였고, W에 대한 첫인상이 '싸가지 없고 건방진 놈'이라는 인식만 남게 되었다.
다음날 W는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세일즈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W는 간밤에 술을 꽤나 마셨던지 하얀 피부에 대비되어 뺨이 더 붉어져 있었고 버터발린 혀는 더 꼬여 있었다. 강연을 듣고 난 직원들의 W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호불호가 딱 반반이었다.
"이번에 Mr.W가 퇴직을 하는데 김 이사가 좀 다녀오세요. 그래도 미주법인장이 퇴사하는데 본사 임원이 가서 마무리 짓는 성의를 보여야겠습니다."
몇 년이 흐른 뒤 부장에서 이사로 승진하여 인사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 이사를 사장님이 불러 지시하였다. W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김 이사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사장님의 지시를 거역할 수도 없었고, 그래도 W 덕분에 난생처음으로 미국 구경을 하게 된 데에 의미를 두고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그동안 몇 년이 지나도록 미주법인의 실적은 나아지지를 못했다. 멀쩡한 외모에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았던 W는 성과부진 사유를 전부 회사 측으로 돌렸다. '품질이 훌륭하지 못하다' '값이 비싸다' '납기가 길다' '제품 구색이 다양하지 못하다' '기술 서비스가 부족하다' 등등. 출장 전에 해외영업팀 직원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김 이사는 생각했다. 아니 세상에 값싸고 품질 좋고 서비스까지 좋은 제품이 있으면 개나 소나 다 팔지 베테랑 세일즈맨이 할 소리인가 싶었다.
점점 성과창출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고 본사 각 부서에서 미주법인에 대한 원망이 높아지자 그동안 회사 내 최고 대우를 받으며 단물 쪽쪽 빨아먹던 W가 그만두겠다며 사표를 냈다. 거기에 덧붙여 공과사를 구분 못하는 일들이 발생하였었는데 그때마다 W는 회사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는 핑계를 댔다. 규정이 미흡하면 미국실정에 맞게 법인장인 자기가 규정을 만들면 될 것을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 이야기를 그는 회사 탓만 하였다. 하기야 그렇게 일은 안 하고 핑계만 대는 게 미국인들의 상식인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였다.
미주판매법인은 애리조나주의 피닉스에 있었다. 원래는 LA에 있었는데 W가 고집을 하여 그곳으로 이전을 하였다고 했다. 기업을 상대로 세일즈를 해야 하는 제품이므로 굳이 LA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굳이 피닉스에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김 이사가 미주판매법인 사무실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세 시반쯤 되었다.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W는 보이지 않았다. 직원 말로는 조깅을 하러 갔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버젓한 근무시간에. 아무리 사표를 냈어도 그때까지는 엄연히 회사 소속이었고 월급을 받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게 미국인들이 말하는 상식인지도 몰랐다. 네 시반이 다되어서 땀을 흘리며 들어온 W는 김 이사와 가볍게 악수만 하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씻고 나서 퇴근시간이 지났다며 휑하고 가버렸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러시아워에 걸려 퇴근길이 힘들대나 어쨌대나 하며.
김 이사는 그날 미주법인의 유일한 한국인인 주재원 조 대리와 저녁을 함께 먹었다. 미국 식당에서 양식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일인분이 어찌나 많은지 한국의 거의 삼인분에 가까웠다. 김 부장은 그 양에 깜짝 놀랐다. 덩치가 큰 놈들이니까 먹기도 많이 먹는군 싶었다. 스테이크는 짜기만 짜고 맛은 별로였다. 거의 절반 이상을 남긴 김 이사는 맥주만 벌컥벌컥 마셨다. 음식이 하도 짜서 그런지 맥주는 먹을만하였다.
식사 후 조 대리는 김 이사를 미리 예약해 둔 호텔로 안내하였다. 휴양도시답게 피닉스의 호텔은 아주 훌륭하였다. 주로 가족단위로 여행을 오는 관계로 객실이 모두 큼지막하였다. 김 이사 역시 온 가족이 묵어도 될만한 널찍한 객실에 묵었는데 하루 숙박비 500불짜리를 지역기업 프로모션을 받아 반값에 묵는 것이라고 조 대리가 자랑을 하였다. 그러나 왜소한 체구의 동양인 김 이사는 더블침대가 두 개나 깔린 침실이 더욱 크게 느껴졌고 혼자서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외로운 밤을 보내야 했다.
조 대리 말에 의하면 사무실을 피닉스로 옮긴 이유는 단지 W가 피닉스에 살아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는 피닉스에 집도 샀는데 값이 거의 두배로 뛰어 돈도 많이 벌었다고 했다. 회사에서 별도로 들어준 의료보험, 덴탈보험으로 시원찮았던 치아도 모조리 새 걸로 바꾸었다고 했다. 어쩐이 이빨이 세더라 싶었다. 퇴근시간이 원래 오후 5시였는데 자기 퇴근길이 막힌다는 이유로 4시 반으로 당겼다고 했다. 3시 반이면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나가 조깅을 하고 와서 씻고 퇴근한다고 했다. 와우! 대단한 위인이었던 것이다.
다음날 김 이사는 W와 미팅을 가졌다. 퇴직에 따른 조치사항을 설명하고 업무인수인계 내용을 확인하였다. 별로 진행 중인 일이 없어서 인수인계 사항은 별게 없었고, 주로 논의한 사항이 입사 때 근로계약서에 명시했던 근무기간별 성과금에 관한 내용이었다. W는 계약 당시 성과에 관계없이 단지 근무기간에 따른 별도의 인센티브를 요구해서 계약서에 넣었는데, 결과적으로 성과를 낸 것도 없이 성과금만 두둑이 챙긴 꼴이 되고 말았다. 흡족한 개인 성과창출에 만족한 W는 얼굴에 활짝 웃음을 머금고 악수한 김 이사의 왜소한 손을 힘차게 흔들어 댔다. 미팅을 마친 김 이사는 사장님께 'Mr.W의 퇴사처리가 원만하게 마무리되었다'고 메일로 보고를 드렸다.
그날 저녁 멕시칸 식당에서 미주판매법인 직원들이 함께한 가운데 W의 송별회식이 있었다. W는 칠리소스가 양념된 치킨윙을 엄청 좋아했는데 거의 삼십 개는 먹었다. 맥주도 엄청 마셔댔다. 그의 혀가 버터 대신 얼얼한 칠리소스에 마비되었는지 상당히 뻣뻣해졌고 덕분에 김 이사는 그의 말을 조금은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놈이 김 이사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덕분에 잘 놀다 간다. 너희 회사 정말 좋은 회사다. 하하하."
J기업에서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미주법인에 현지 외국인 책임자를 채용하지 않았고 본사 직원을 파견 보냈다. 그리고 사무실을 다시 LA로 옮겼다. 이후 성과가 좋아졌다고 한다.
* 이 이야기는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련이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