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보다 어려운 노사(하)

by 이은호



"김 상무님, 이렇게 모이기도 힘든데 술 한잔 더 하러 가죠."


"예?"


노조 위원장이 '장려상'이라고 적힌 흰 봉투를 김 상무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 봉투는 족구대회에서 결승에 오르지 못한 네 팀에게 주어지는 상금이 든 봉투였는데, 겨우 목욕비나 할 정도의 금액이 들어있었다. 그 말인즉슨 '이것을 술값에 보태고 나머지는 김 상무 네가 계산하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이십여 년간 직장생활을 한 김 상무가 그걸 못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자, 다들 갑시다."


주 위원장이 상무가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J기업 노조 동료들은 물론 같은 팀으로 족구시합을 뛰었던 다른 회사 사람들까지 이끌고 버스에 올랐다. 손님들을 시내까지 태워다 주기 위해서 식당에서 마련해 놓은 차량이었다. 맨뒤에 여성부장이 탔고 김 상무가 그 뒤를 따랐다. 김 상무는 양 부장 옆에 빈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구불구불 산길을 씽씽 달려 나갔고, 버스가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김 상무의 어깨와 양 부장의 어깨가 자연스럽게 부딪혔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며 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가 싶더니 붉은빛을 점점 잃어가며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버스가 시내에 닿았다. 차에서 내린 일행들은 주 위원장 뒤를 따라 한 노래주점에 들어섰다. 주점은 제법 규모가 컸고 인테리어도 깔끔한 게 평균 이상의 수준은 되는 곳이었다. 술손님이 노래주점을 찾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으나 주 위원장이 미리 연락을 해두었는지, 늘씬한 키에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활짝 웃으며 일행을 맞이하였다.



"어머나, 위원장님! 어서 오세요!"


"마담, 잘 지냈어요? 오늘 행사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왔는데 준비는 되어있죠?"


"네, 그럼요. 당연하죠. 우리 주 위원장님 명령이신데. 자, 이리로 오세요."


마담이 주 위원장의 팔짱을 끼며 일행을 안쪽 VIP 룸으로 안내하였다. 룸은 거의 삼십 명 이상 수용할 정도로 컸는데, 이미 기본적인 세팅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앉았고, 주 위원장이 뒤따르던 김 상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김 상무님, 이곳은 제가 자주 오는 곳인데 술값은 마담과 흥정을 해놓았거든요. 크게 부담 가지는 않을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계산하죠."


"고맙습니다, 상무님."


김 상무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어차피 계산할 거면 주 위원장이 기분 좋게 맞춰줄 수밖에. 다시 룸으로 들어간 주 위원장이 김 상무 손을 잡고 안쪽에 비어있는 주빈석으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그러자 양 부장이 슬며시 다가와 김 상무 옆에 앉았다. 주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는 우리 상무님께서 마련한 자리니까 껏 취하고 맘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상무님! 위원장님!"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그녀들은 남자들 사이사이로 가서 한 명씩 앉았다. 김 상무만 빼고. 그러고 보니 졸지에 김 상무와 양 부장이 파트너가 된 셈이었다. 이어서 술과 안주가 나오고, 주 위원장이 능숙한 솜씨로 폭탄주를 제조하여 한잔씩 돌렸다.


"위하여!"

"위하여!"


모두들 원샷으로 잔을 비웠다. 양 부장도 원샷을 했고 김 상무도 분위기 상 잔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폭탄주가 제조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원샷! 다들 잘들 마셨다. '술은 삼세번이지' 주 위원장이 또 폭탄주를 돌렸다. 양 부장이 술잔을 들고 있는 김 상무의 손을 잡으며 귓속말을 하였다.


"상무님, 무조건 따라 드시지 마시고 알아서 적당히 드세요."


"네, 알았어요!"


양 부장이 김 상무를 보고 살짝 미소 지었고, 그는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다행히도 김 상무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다들 끼리끼리 술을 마시면서 왁자하게 떠들어 댔다. 잔이 비면 옆에 앉은 아가씨가 안주를 건네고 빈 잔을 다시 채웠다. 모두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도 되는 양 술을 끝도 없이 마셔댔다. 김 상무는 '다들 일을 저렇게 열심히 했으면 회사가 훨씬 좋아졌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스테이지로 나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몇 쌍이 따라 나가 서로 부둥켜안고 춤을 추었다. 부르는 곡과 블루스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들의 손은 여자들의 이곳저곳을 더듬느라 바빴다. 러브샷을 하고 뽀뽀를 하고, 주거니 받거니 얼굴이 화끈해지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연출되었다. 김 상무가 슬쩍 양 부장을 훔쳐보니 그녀도 꽤나 민망해하는 모습이었다. '하, 이를 어쩐다' 김 상무가 고민하는데, 양 부장이 그의 팔을 잡으며 귓속말을 하였다.


"상무님, 전 이제 일어나야겠어요. 같이 나가지 않으실래요?"


"예? 그래도 될까요?"


김 상무는 양 부장이 이끄는 손을 잡고 룸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는데 눈치를 챈 주 위원장이 따라 나왔다.


"김 상무님, 벌써 가시려고요?"


"아, 위원장님! 아무래도 저는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위원장님께서 잘 마무리를 해주시죠. 제가 계산은 해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살펴가십시오. 양 부장, 가는 길에 상무님 좀 부탁해요."


"네, 위원장님!"


'양 부장에게 부탁하기는 뭘 부탁해? 내가 어린앤가?' 김 상무는 고개를 갸웃하며 프런트로 가서 법인카드를 내밀었다.




김 상무가 밖으로 나오자 이미 밤이 깊어진 데다 휭 바람이 불어와 공기가 제법 선선하였다. 기다리고 있던 양 부장이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상무님, 우리 따끈한 우동 먹으러 가지 않을래요? 근처에 맛있게 하는 곳이 있거든요.”

“그래요? 속도 풀 겸 한 그릇 하고 갈까요?”


그러고 보니 점심식사를 한 지 한참 되었고 저녁도 건너뛰고 빈속에 술만 마셔댔다. 뭔가 뜨끈한 국물을 마시면 속이 한결 나아질 것 같았다. 둘은 화려한 네온사인이 춤추는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젊은 남녀들이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오가고, 그 옆 골목에는 한참 어려 보이는 여자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담배를 피우고. 통창을 통하여 안이 훤하게 들여다 보이는 고깃집에는 사람들이 고기 굽고 술 마시며 고기와 함께 얼굴이 벌겋게 익어가고. 연탄불에서 구워지는 꼼장어의 구수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가게를 지나 조금 더 가서 양 부장이 말한 우동집이 있었다.


<청춘우동>


뜨끈하면서도 시원한 국물이 들어가자 김 상무는 속이 확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술보다는 우동국물이 나았다. 술기운인지 뺨이 발그레 물든 양 부장이 우동을 한 젓가락 먹고 나서 입을 열었다.


"상무님, 오늘 고생 많으셨죠? 호호호. 어떠셨어요?"


"뭐, 나름 재밌었습니다. 술 마시는 거 빼고는요. 하하. 양 부장님은 술을 좀 하시나요? 제법 드시는 것 같던데."


"그렇던가요? 호호. 저도 잘 몰랐는데 노조활동하면서 제가 술이 세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많아지더라고요. 이제 웬만한 남자들에게 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부럽습니다. 저는 술이 센 사람이 정말 부럽더라고요. 하하."


둘은 우동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산행도 하고 족구시합에 술도 취하도록 마시고, 김 상무는 하루를 정말 힘들게 보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리고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자 피로감이 급격하게 몰려왔다. 그녀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상무님, 우리 다음에 한번 만나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예? 좋아요.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하죠."


김 상무는 양 부장과 헤어져 택시에 올랐다. 집이 서로 반대방향이었기 때문에 같이 가기는 곤란하였다. 차장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도심풍경을 바라보며 김 상무는 생각하였다. 양 부장이 자신에게 할 말이 무엇일까? 혹시 이상한 감정은 아니겠지? 김 상무는 노래주점에서 그녀가 귓속말을 할 때, 자신의 어깨를 통해서 느껴지던 묵직한 가슴의 감촉과 귓가를 간지럽히던 더운 숨결이 생각났다. 그리고 우동집을 나와 머뭇머뭇하던 그녀의 모습도 좀 이상스러운 데가 있었다. '에이, 아니겠지...' 김 상무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일주일 후, 양 부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김 상무는 퇴근 후 조용한 일식집에서 그녀를 만났다. 주홍색 투피스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나온 그녀는 지난번 등산복을 입은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웨이브 진 풍성한 머릿결에 화장을 곱게 한 그녀가 은은한 향수냄새를 풍기며 김 상무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인사를 건네며 살짝 미소를 짓는 그녀가 김 상무에게는 조금 낯설기도 했지만 너무 예쁘게 보였다. '오호, 이렇게 예뻤었나?' 김 상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잠시 마음이 설레었다.


"네, 저야 잘 지냈죠. 양 부장님은 어떠셨어요?"


"저도 잘 지냈어요. 호호호."


김 상무가 그녀의 잔에 맥주를 따랐고, 그녀도 김 상무에게 맥주를 따라 주었다. 그리고 서로 가볍게 잔을 부딪히고 나서 목으로 넘겼다. 맥주를 마시는 그녀의 하얀 목선이 김 상무의 눈에 들어왔다. 시원한 맥주를 한잔씩 하고 나서 둘은 신선한 회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물론 술을 억지로 마시라고 권하는 사람은 없었고, 마음 내키는 대로 마시면 되는 자리였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여자와 둘이 오붓하게 즐기는 자리라니. 상무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은 지난번 술자리가 위원장님이 상무님과 술을 마시려고 하는 자리는 아니었어요. 다른 회사 노조간부들을 접대하는 자리였죠."


술을 세 잔 째 비우고 회 한 점을 입에 넣으며 양 부장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김 상무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하였다. 아마도 그녀가 할 말이 있다는 게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요? 위원장님이 사람들을 접대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사실은 말이에요..."


김 상무는 양 부장으로부터 노조집행부와 주 위원장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내년 3월에 주 위원장의 임기가 끝나는데, 그가 지역연맹 위원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J기업의 단위노조 위원장은 그만두더라도, 지역이나 산별 노조의 상급단체 위원장이 되면 노조 전임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른 회사 노조간부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 일환으로 술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김 상무가 주 위원장의 후원회장꼴이 되고 만 셈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노조활동을 하며 인지도를 높여가다 보면 정치권으로 진입하는 길도 열린다고 하였다. 국회의원이 되기는 힘들지만 시의원 정도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하였다. 노조 위원장 자리가 조합원들의 선거로 선출되는 만큼, 노조활동은 바로 정치활동이나 진배가 없는 정치판이기도 한 것이었다.



"회사 차기 노동조합 구성 때 제가 부위원장을 할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은 위원장 자리를 노려볼 거고요."


양 부장이 김 상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녀는 그냥 늘씬한 몸매에 얼굴 예쁜 여자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여장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에게 왜 그런 속내를 내보일까? 김 상무는 그 점이 궁금해졌다.


"상무님, 저는 노조와 회사가 윈윈 할 수 있는 관계로 이끌고 싶어요. 경영환경이 녹녹지가 않은데도 불구하고 회사가 탄탄하게 성장하고 있는 게 우리 조합원들에게도 복인지 몰라요. 그런 걸 노조가 망쳤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거든요."


사실 회사와 노조와의 관계가 결코 순탄한 상황은 아니었다. 물론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었지만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팽팽한 줄다리기. 주 위원장 이후 차기 집행부가 들어서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몰랐다. 팽팽한 줄다리기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 그런 상황에서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양 부장 같은 사람에게 힘이 실린다면 회사입장에서는 결코 손해 날 일이 아니었다. 물론 양 부장의 진짜 속 마음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김 상무가 생각하기에 그녀가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양 부장님 생각이 참 마음에 드네요. 혹시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을까요?"


"많죠! 우리 앞으로 서로 도와가며 잘해봐요."


양 부장이 진지한 얼굴로 바짝 다가앉으며 김 상무의 손을 잡았다. 김 상무가 움찔하였으나 손을 뺄 분위기가 아니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건배해요!"


그녀가 김 상무의 손을 놓고 술잔을 들었다. 김 상무도 따라서 잔을 들었다. 그리고 짠 하고 잔을 부딪히고 둘 다 술을 쭉 들이켰다. 술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활짝 웃었고, 김 상무도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빨간 입술 사이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반짝이고 있었다.



* 이야기는 다음화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계가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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