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계 혹은 그녀의 사랑법

by 이은호



"상무님, 우리 노래방에 가요! 오늘은 제가 쏠게요."


"예? 둘이서요?"


"뭐 어때요? 노래 한곡 부르는데..."


일식집을 나오자 양 부장이 김 상무 팔을 잡고 근처 노래방으로 이끌었다. 김 상무는 분위기 상 그대로 헤어지기는 힘들 것 같고, 그렇다고 술집에 가서 술만 마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노래방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방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고 덕분에 남녀 두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큼직한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녀는 양주 작은 것과 맥주 그리고 마른안주를 주문하였다. 그러고 나서 트렌치코트와 윗도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녀는 속에 몸에 딱 붙는 하얀색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 볼륨과 몸매가 다 드러나 보였다. 그녀가 김 상무에게 손을 내밀며 윗도리를 달라고 하였다. 그는 이왕 이렇게 된 거 편하게 있자 싶어 윗도리를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상무님, 폭탄주보다는 스트레이트로 드시는 게 낫겠죠? 아니면 얼음물로 희석해 드릴까요?"


"예, 그렇게 하죠."


김 상무 옆에 나란히 앉은 양 부장이 능숙한 솜씨로 얼음을 채운 큰 잔에 양주를 부었다가 다시 작은 양주잔 두 개로 옮겨 담았다. 잔에 든 술이 조명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났다.


"우리 건배해요! 아니 건배가 아니고 노사화합을 다지는 의미에서 이렇게요."


"에? 러.. 러브샷?"


김 상무가 피할 겨를도 없이 양 부장이 술잔을 든 팔로 그의 팔을 휘감았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뺨이 거의 붙을 만큼 가까워졌고,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훅 김 상무의 코를 찔렀다. '헉!' 김 상무는 아찔한 현기증이 일며 아랫도리에 불끈 힘이 가는 것을 느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김 상무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팔을 푼 그녀가 다시 큰 잔에 양주를 붓고 얼음을 채워 넣었다.



"무슨 노래 좋아하세요? 제가 틀어드릴게요."


후끈한 분위기에서 술을 몇 잔 하고 나서 양 부장이 책을 김 상무에게 건네며 물었다. 김 상무는 그녀의 저돌적인 공세에 정신 차리기가 힘들던 차에 차라리 잘 되었다 싶어 책을 펼쳤다. 노래 부르는 동안에는 별일 없겠지 싶었던 것이다. 그의 노래를 예약한 양 부장이 자신의 노래도 예약하였다. 전주가 흘러나오고 김 상무가 마이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양 부장이 따라 일어섰다.


김 상무나 양 부장이나 노래를 썩 잘하지는 못했는데, 그렇다고 듣기 거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편하게 듣고 즐길 정도는 되었다. 둘이 교대로 한참 노래를 불렀다. 신나는 노래를 다 부른 양 부장이 더운지 니트의 목 부분을 느슨하게 당기며 후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맥주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목을 축인 그녀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엔 슬로 템포의 조용한 곡이었다. 그녀는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김 상무는 자리에 앉아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다보았다. 모니터에 자막으로 나오는 노랫말이 마치 무슨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김 상무의 눈길을 의식한 그녀가 마이크를 내려놓더니 김 상무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춤춰요!"


김 상무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일어서서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몸은 뜨거웠고 얇은 옷을 통해 몸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가쁜 숨소리, 달큰한 숨결, 묵직하게 전해오는 가슴의 감촉. 그녀를 품에 안고 음악에 맞춰 천천히 스텝을 밟는 김 상무의 온 신경은 잔뜩 곤두서 있었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조차도 모두 알아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잔잔한 멜로디가 흐르는 가운데 그녀가 김 상무를 잡은 팔에 힘을 주며 몸을 더욱 밀착시켜 왔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상무님이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녀는 그렇게 훅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적극적인 공세가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몸매 좋고 예쁜 그녀가 싫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저것 자상하게 챙겨주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도 고와 보였다. 게다가 앞으로의 원활한 노사관계를 고려하면 그녀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둘의 만남이 이어졌다. 남녀 간의 관계가 참 묘해서 만남이 거듭될수록 그의 마음도 조금씩 움직였다. 하지만 마지막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녀의 태도로보아 그가 이끌면 어렵지 않게 그 선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직장 내 관계를 생각해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도 여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인지 차마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는 못했다.



"제가 싫으세요?"


시간이 흐른 뒤, 한 이자까야 술집에서 잔을 기울이던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이미 전작이 있었고 옮긴 자리에서도 적잖은 술을 마신 그녀가 초점이 조금 풀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와 달리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 정신이 온전한 상태였다. 그가 온화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양 부장님을 싫어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곱고 아름다우신데요."


"그런데요? 왜 그렇게 사람 마음을 몰라주시죠? 아님 모른 체하는 건가요? 그러면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그녀가 눈을 흘겼다. 그리고 눈이 붉게 충혈되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여장부인줄 알았는데 역시 연약한 여자였던 걸까? 그는 난감했다. 그녀가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당장 그녀를 안아주고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끝내 해 줄 수가 없었다.




해가 바뀌고 3월이 되었다. J기업의 주 노조위원장은 원하던 대로 상급단체인 지역연맹 위원장이 되었다. 신임 노조위원장으로는 부위원장으로 있던 정 위원장이, 그리고 양 부장은 계획대로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J기업 노사 간 단체협상이 진행되었다. 신임 정 위원장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조합원들을 교묘하게 선동하고 분위기를 조성하여 유례없이 높은 임금인상과 성과금을 요구하였다. 심지어 해외공장에서 벌어들이는 이익까지 나누어 달라고 하였다. 회사에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다. 노조와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김 상무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노사 간 양보 없이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어느 날, 김 상무는 양 부위원장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양 부위원장을 통해서 뭔가 노조 쪽 분위기를 파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마침 시간이 된다고 하여 김 상무는 퇴근 후 그녀를 태우고 한적한 교외로 향했다. 때가 때이니만큼 혹시 모를 남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한정식집의 조용한 방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노사회의 때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밖에서의 만남은 오랜만이었다. 그녀의 공세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인 김 상무로 인해 둘의 사이가 소원해져 있었다.



"양 부위원장님, 노조 쪽에서는 이번 요구사항을 계속 관철시킬 겁니까?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김 상무의 물음에 그녀가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담담하게 말했다. 전에 둘이 있을 때의 나긋한 표정도 온데간데없었다.


"그동안 근로자들의 희생으로 회사가 이만큼 성장했으면 그 정도는 들어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회사가 충분히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습니까? 저희 쪽에서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김 상무는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놀랐다. 전에 서로 협력하여 윈윈하자며 러브샷까지 해놓고 이렇게 표정을 바꿀 수 있나 싶었다. 그래도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김 상무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협상이라는 게 서로 양보하면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도록 노력해야죠. 노조 측에서 그렇게 꼼짝도 안 하면 협상이 되겠습니까? 제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양 부위원장님께서 분위기를 한번 잡아 주시죠."


김 상무의 말을 들은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상무님 입장이요? 사실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는데 하나만 알려드리죠. 다음 주부터 부분 파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잔업거부와 정량작업을 포함해서요. 그래도 관철이 안되면 2주 후부터는 전면파업도 불사할 겁니다. 그게 지금 조합 쪽 분위기예요. 아시겠어요?"


"예? 뭐라고요?"


김 상무는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주문이 밀려 매일 잔업을 하며 쳐내도 모자라는 판국에 정시작업을 넘어 파업이라니? 그런 일이 생기면 정말 큰일이었다. 고객과 약속한 납기가 엉망이 되고 대거 클레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일이 커지면 노조업무를 맡고 있는 그의 입지도 상당히 좁아질게 분명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노사 간 문제로 파업까지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회사를 위해서나 김 상무 자신을 위해서도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절대로 안될 일이었다.


김 상무는 이리저리 그녀의 마음을 떠보았으나 그녀는 단호하였다. 짐작건대 노조집행부 내에서 그녀의 입김이 상당해서, 어떻게든 그녀를 움직이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요지부동. 김 상무는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였고,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별 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 채 둘은 식당을 나왔다. 그리고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오늘 김 상무는 양 부위원장과의 만남에서 별 소득을 얻지 못하였다. 아니 잘못하면 노사관계가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는 만남이기는 하였다. '사장님께 어떻게 보고 드리고 돌파구를 찾지?' 하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김 상무는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인적이 끊긴 밤, 한적한 국도를 차는 막힘없이 달렸고 둘은 말이 없었다. 뭔가 해보기는 해 봐야겠는데, 김 상무는 마음이 복잡하였다.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그의 심경을 눈치라도 챘는지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상무님, 기회를 한번 드릴까요?"


"예? 어떤..."


"저 앞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우회전하세요."


무슨 일인가 궁금했지만 김 상무는 잠자코 그녀 말대로 우측 깜빡이를 넣고 속도를 줄이며 우회전하였다. 한 이백여 미터나 갔을까 그녀의 무심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네, 됐어요. 오른쪽 건물 앞에 세워보세요."


김 상무는 차를 세우고 그곳이 어디지 살펴보았다. 하얀 벽면에 군데군데 불이 들어온 건물 입구에는 <○○모텔>이라고 표시된 간판이 주황색 불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상무님, 어때요? 우리 이제 같은 배를 타볼래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예요. 다 상무님 선택에 달렸어요."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김 상무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그가 대답을 할 차례였다. 그녀와 같은 배를 탈 것인가? 아니면 방향이 정반대인 다른 배를 탈것인가?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마주 보던 김 상무가 정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사실 그도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그동안 몇 번 만나면서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여장부의 기질과 또 여자로서의 나긋한 매력을 모두 가진 여자였다.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탄탄하고 예쁘기까지 한 그녀를 갖고 싶다는 원초적 욕구가 불끈불끈 솟기도 하였다. 그러나 회사 내 위치를 고려할 때 그러면 안 된다는 이성적인 판단이 앞서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꼴이었다. 노조업무를 책임진 임원으로서 자칫하면 조정 업무 실패로 노사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가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을 때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였다. 여자의 마지막 자존심을 뭉개는 꼴이 될 것이니, 그녀가 얼마나 독을 품고 일을 벌일 것인가! 그냥 눈 딱 감고 오늘 그녀와 함께 한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사협상도 원만하게 해결되고 또 매력적인 그녀도 품에 안고. 그의 입장에서 조금도 손해 날 일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래 결심했어!'


그가 핸들을 천천히 돌려 유턴했다. 그리고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원래 가던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는 불현듯 그녀가 함께 타자고 하는 배가 타이타닉처럼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크고 안전하고 화려한 배 타이타닉호. 그러나 결국 차가운 바닷속으로 수장되어 버린 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죽는 것도 멋있을 것 같았지만 그건 분명히 영화의 한 장면. 현실 속에서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아닌 건 아닌 거지!'


김 상무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쥐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액셀레이터를 더욱 힘 있게 밟았다. 그러는 그의 옆자리 조수석에 앉은 그녀, 양 부위원장은 달리는 차 안에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였다. 그녀의 꼭 쥔 두 손이 부르르 떨리고 두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이 글은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계가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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