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세상,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by 이은호



김 상무가 노조 양 부위원장과 교외에서 단둘이 만났던 다음날 회사에서 노사회의가 열렸다. 전날 그녀가 내민 손길을 뿌리쳤던 김 상무는 회의 걱정에 잠도 설치고 아침밥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출근하였다. 거의 빈속에 쓴 커피를 마시며 담당 직원이 작성한 회의자료를 검토하다 보니 어느새 회의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나온 그가 회의실 쪽으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반대편에서 오고 있는 노조 대표들이 눈에 들어왔다. 양 부위원장도 거기에 있었다. 회의실 앞에서 마주친 그녀의 두 눈에는 파란 불꽃이 일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앞을 스쳐서 회의실로 들어갈 때, 그는 마치 시베리아벌판에 서있는 것 같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직감했다. 그날 회의가 험난할 것임을.


아니나 다를까. 회의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조 정 위원장이 폭탄발언을 하였다. 노사회의 중단을 선언하며 다음 주부터 잔업거부와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 부분 파업에 들어간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협상중단과 파업 발표에 최 사장을 비롯한 사용자 측 위원들이 깜짝 놀랐다. 사실 김 상무가 전날 언질을 받았던 이야기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지는 못했었다. 최 사장이 '이게 무슨 말이냐? 작업을 하면서 협상을 이어가야지 일방적으로 이러는 게 어디 있느냐?'의를 제기하였지만, 그들은 들은 체 만 체 모두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그걸로 노사회의는 끝이 났다.


최 사장이 임원들을 둘러보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사전에 노조 측 움직임을 몰랐냐고 질책하였다. 김 상무는 최 사장의 눈길을 피했다. '알고 있었다고, 양 부위원장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서 막지 못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최 사장은 대책을 마련해서 보고하라고 호통을 치고서 회의실을 떠났다. 회의실에 남겨진 임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난감해했다. 어떻게든 잔업거부와 파업은 막아야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있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고, 그러자니 답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일단 노조 측 동향을 지켜보자며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에 흘러가 버렸다. 그리고 노조 측에서 선언한 대로 잔업거부와 부분파업이 시작되었다. 지난 며칠 동안 김 상무는 많은 고민을 하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 양 부위원장을 만나 상황을 되돌려보고 싶었다. 몇 번을 핸드폰 화면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띄워놓고 누를까 말까 고민하였다. 하지만 차마 누르지를 못했다. 이미 사태가 벌어진 후라 그녀를 통해 수습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고, 가능하더라도 그녀가 자신을 다시 받아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혹시라도 그녀가 받아준다면, 그건 김 상무가 그녀와 한배를 타고 그녀와 밤을 함께 보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하였다.


회사는 혼란에 빠졌다. 안 그래도 빠듯하게 운영되던 생산일정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거래선에 제때 공급해야 할 납기가 다 흐트러지고 일반 대리점으로 나가는 물량은 거진 절반이 줄고 말았다. 그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경쟁업체에 시장의 주도권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연일 대책회의가 열리고 해결책을 찾아보라는 최 사장의 독촉이 임원들의 뒤통수를 때렸다. 특히 대 노조업무를 맡고 있는 김 상무에 대한 비난이 거셌다. 도대체 뭐 하고 있었냐고.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 노조원들이 모여, '생존권을 보장하라!' '악덕 경영진 반성하라!' 등의 피켓을 들고 떠들어 대는 소리가 김 상무의 귀를 후벼 팠다. 그는 가슴이 아팠다. 이 난국을 어떻게 넘을 수 있을까?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났다. 이제 노조 측에서 전면파업을 하겠다고 선언한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생산차질이 아니라 공장이 올스톱될 판이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김 상무는 정 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노조사무실을 찾았다.


"김 상무님, 해결책을 가지고 오셨나요?"


소파에 앉아 상체를 뒤로 젖히고 배를 앞으로 쭉 내민 채로 정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그의 뒤룩한 배가 더욱 크게 보였다. 김 상무는 최 사장과 의논된 회사 측 타협안이 적힌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


"정 위원장님,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건을 가져왔습니다. 검토해 보시고 부디 수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협상이라는 게 서로 양보하기도 하고 서로 인정하기도 하면서 타협점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기 놔두고 가보세요. 나중에 연락드리죠."


정 위원장은 서류를 살펴보지고 않고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김 상무에게 말했다. 그의 무성의한 태도에 김 상무는 속이 끓어올랐지만 꾹 참고 노조사무실을 물러나왔다. 그런데 입구에서 그녀, 양 부위원장과 마주쳤다.


"양 부위원장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그녀는 김 상무가 건네는 인사에 흘낏 눈길을 한번 주더니 대답도 없이 노조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가 '저.. 저... 부 위원장님!' 하며 그녀를 재차 불렀지만, 그녀는 찬바람만 쌩 일으키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허탈한 김 상무는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찌푸린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노조사태가 정말 엉뚱한 곳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일단은 회사 측의 타협안에 대하여 노조 측에서 반응을 보였고, 그 일환으로 전면파업을 철회하였다. 아마도 그들도 파국으로 치닫는 데에 대한 부담을 느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종전처럼 잔업을 제외한 정시작업과 수요일 금요일 오후 부분파업을 하면서 노사회의를 이어가기로 하였다. 최대의 고비는 넘겼지만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여전히 계속되는 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상무에게 전임 노조위원장인 주 위원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주 위원장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연맹 일은 잘 되시고요?"


"예,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김 상무님, 요즘 고생이 많으시지요?"


시내 횟집에서 만난 주 위원장은 J기업의 노조위원장으로 있을 때보다 더 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지역연맹 위원장자리가 훨씬 좋은 자리인 듯싶었다. 주 위원장이 비록 회사를 떠나 상급단체로 갔지만 노조전임자 자리가 여전히 회사에서 지원을 해주는 자리였기 때문에, 그가 가끔 김 상무에게 연락을 하였고 김 상무를 여전히 필요로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실 그가 선거운동을 할 때 알게 모르게 김 상무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으니 무시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싱싱한 활어회에 소주를 몇 잔 걸치고 나서 주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듣자니 노사협상이 상당히 힘들게 전개되고 있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정말 죽겠습니다. 도저히 회사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해서요. 그것도 일을 하면서 협상을 해야 하는데 잔업거부와 부분파업까지 하니 지금 회사가 엉망입니다."


"내가 있을 때가 봄날이었다는 것을 이제 실감하시겠습니까? 하하하. 이번 노조집행부가 좀 거칠기는 하죠."


"주 위원장님,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아무래도 위원장님께서 현 집행부의 성향을 잘 아시잖습니까!"


주 위원장이 싱긋 웃으며 술잔을 쭉 비웠다. 김 상무도 따라 술잔을 비우고 술병을 들어 그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그러고 나자 주 위원장이 웃음기 가신 얼굴로 정색을 하더니 김 상무 쪽으로 상체를 숙이고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사실은 내가 김 상무에게 해줄 말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가공1과에 하 반장이라고 있지요? 그 사람을 만나보세요. 뭔가 이야기를 해줄 겁니다. 잘만하면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어요."


"네? 어떤 이야기인데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실마리라니! 김 상무가 귀가 솔깃해서 캐물었지만 주 위원장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건 직접 들으시고 절대 내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특히 지금 노조집행부에는요. 그래도 제가 데리고 있던 사람들 아닙니까?"


"네, 알겠습니다. 위원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 상무와 주 위원장은 더 이상 회사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나라 걱정을 하며 술을 마셨다. 주 위원장은 정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문제가 있어 큰 일이라고 하면서, 노조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어 삐뚤어진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침을 튀기며 열을 올렸다.




주 위원장과 헤어진 김 상무는 택시에 올라 집으로 향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주 위원장이 말한 실마리란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리고 하 반장이 알고 있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김 상무는 오래전 노사정 단합대회 때 양 부위원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함께 등산을 하면서 그녀로부터 노조사정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그중에 현 집행부에 불만이 있는 반대세력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때 하 반장을 거론했던 것 같았는데, 시간이 오래되어 기억이 확실치는 않았다. 하지만 만일 하 반장이 반대세력이고 뭔가 현 집행부의 약점을 알고 있다면? 그래서 그 약점을 물고 늘어져 현 집행부를 와해시킬 수 있다면? 그렇다면 반대세력이 노조를 장악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주 위원장은 현 집행부와 같은 편일 텐데, 자기가 회사 노조위원장을 할 때 정 위원장이 부위원장 그리고 양 부위원장이 여성부장을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다들 자기 밑에서 일을 했던 동료들인데, 그들을 내치고 반대세력인 하 반장의 손을 들어줄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김 상무의 머리로는 퍼즐이 맞추어지지가 않았다.


"아이고, 머리야!"


안 그래도 최근에 신경이 곤두서 잠도 설치고, 몸도 마음도 피곤한 데다가, 술도 취한 상태에서 머리를 썼더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김 상무는 머리를 움켜쥐며 좌석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일 하 반장을 만나보면 뭐라도 알게 되겠지."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김 상무는 급한 일을 처리한 후 생산담당 임원에게 전화를 걸어 하 반장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하였다. 본인이 직접 현장으로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남들의 이목을 끌게 될까 봐 응접실에서 조용히 만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하 반장이 들어왔고 인사를 나누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한 하 반장이 입을 열었다.


"김 상무님, 어젯밤 주 위원장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김 상무님과 의논하라고요."


주 위원장이? 어제는 분명 자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 반장 입에서 먼저 주 위원장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니 이미 두 사람은 보통 관계가 아닌 듯싶었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 반장이 알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게 어떻게 노사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인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래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 반장님!"


하 반장이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사실은 말이죠..."




하 반장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자기 밑에서 일하는 직원 중에 정 노조위원장에게 성추행을 당한 여직원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이로 치면 거의 딸뻘 정도되는 젊은 직원이었는데 울먹이며 자기한테 하소연을 했다고 하였다. 얼마 전 노조위원장이 조합원들을 상대로 조별로 나누어 간담회를 개최하였는데, 간담회 후 이어진 술자리에서 옆에 앉은 그녀를 건드렸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기도 하고, 술에 취한 듯 어깨동무를 하더니 슬쩍 겨드랑이로 손을 넣고 가슴을 더듬었다고 했다. 그녀가 깜짝 놀라 손을 뿌리치자 위원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껄껄 웃으며 다른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더라고 하였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그 모습을 보았을 것도 같은데 모른 체하였다고 했다. 그녀는 분위기상 잘못하면 자기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아 아무 소리 못하고 앉아 있었다고 하였다.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우니 그의 소름 끼치는 손길이 여전히 자신의 가슴을 더듬는 것 같아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하 반장의 이야기를 들은 김 상무는 보통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은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 중 하나였다. 노조위원장이라고 해도 엄연히 회사 직원이었고, 회사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 이전에 성희롱은 위법행위로 경우에 따라서는 형사처벌을 받아야 하는 사안이기도 했다. 회사가 성희롱 사건을 인지하고서도 아무런 조사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게 또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난번 중국공장에서 한국주재원의 성추행 사건이 있었을 때, 전사적으로 예방교육을 실시했는데 또 그런 일이 생기고 만 것이었다. 김 상무는 이번에는 회사에서 정식적인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주 위원장님은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죠? 하 반장님 하고 평소에 소통이 있었나요?"


김 상무는 도대체 주 위원장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한때 반대세력이었던 하 반장과 어떻게 가까워지게 되었는지가 궁금하였다.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사실 현장 내에 여전히 주 위원장과 가까운 사람들이 여럿 있죠. 그들 중에는 현 노조집행부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요. 주 위원장님이 저한테 연락이 와서 한번 만난 적도 있습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대강 짐작이 갑니다."


"김 상무님, 이번 사건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괜히 회사 측에서 정 위원장에 대한 무고나 노조집행부를 핍박하려는 것으로 비치면 죽도 밥도 안됩니다."


"그야 당연하죠. 그리고 그 이전에 성희롱은 분명한 범죄행위입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지요. 제가 고민을 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하 반장과 면담을 마치고 나서 김 상무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면서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있었다.




* 김 상무와 노조 이야기는 다음화로 이어집니다.


* 이 이야기는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계가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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