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기업에서 관리부문을 맡게 된 김 상무는 첫 과제로 직원들에 대한 인사제도를 뜯어고치려다 강력한 제지를 받았다. 사장님은 물론 인사제도를 도입한 전략실장의 벽이 높았는데, 그로부터 사내정치를 하라는 충고까지 받았다. 회사에서 생명을 연장하려면 권력자의 눈치를 보고 시류의 흐름에 적당히 타협하라는 이야기였는데, 김 상무의 성정과는 도저히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월급쟁이 임원주제에 사장님한테 대항할 수도 없고, 사장님의 신임을 받고 있는 전략실장과 다투기에는 승산이 너무 낮아 보였다. 남자가 칼을 뺐으면 한번 크게 휘둘러보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도 멋있을 것 같았으나, 김 상무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사실 그러기에는 용기가 부족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마저 전사하고 나면, '누가 직원들을 생각해서 힘써줄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봉착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쯤 지나 마음을 굳게 먹은 김 상무는 전략실장을 다시 찾았다.
"허 실장님, 지금의 인사제도는 그대로 운영하는 것으로 하고 기준만 조금 완화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상대평가를 하되 저평가자 비중을 최대한 낮추고, 퇴출대상 저성과자에게도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겁니다. 안 그래도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직원을 더 채용해야 하는 상황인데, 직원들의 사기를 꺾어가며 퇴사자가 늘어나는 걸 방치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평가자들 교육을 강화하여 전체적으로 평가 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게 좋겠습니다. 리더십 교육도 병행해서요. 허 실장님이 근무하셨던 컨설팅 회사에서 이 부분을 맡아서 진행해 주셨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요? 그렇게 하시죠. 김 상무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최 사장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려서 승인을 받도록 하죠."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제 한시름 놨습니다."
전략실장이 환하게 웃으며 김 상무의 손을 잡았고 김 상무도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전략실장실을 나오며 김 상무는 생각하였다. 이제 사내정치가 시작되는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이렇게 하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평가기준이 완화되고 평가자 교육을 통하여 부서 간 형평성이나 공정성에 대한 우려가 줄어들면서, 직원들의 인사제도에 대한 불평불만도 표면적으로는 잦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김 상무가 당초에 생각한 '직원들이 도전적 과제를 자발적으로 수행하면서 능력도 키우고 회사도 성장하는 인사제도를 만들겠다'는 근본적인 취지는 무색하게 되었지만, 현실적으로 김 상무 입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해결책을 도모한 셈은 되었다.
"김 상무님, 위원장님이 좀 뵙자고 하시는데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김 상무가 노조 사무국장의 전화를 받았다. 김 상무가 담당하는 업무 중 대 노조 관련 업무가 있었는데, J기업이 제조업체이다 보니 현장직원 전체가 가입되어 있는 노조가 회사 경영에 있어서 무시하면 안 될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회사와 노조와의 관계가 적대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호적이지도 않아, 김 상무 입장에서 노조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김 상무는 '아무리 노조 위원장이라도 볼일이 있으면 자기가 찾아올 일이지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야?' 불평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 위원장님, 안녕하십니까?"
"아이고, 김 상무님! 어서 오십시오."
김 상무가 노조 위원장실에 들어서자 주 위원장이 특유의 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고 나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여직원이 가져온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환담을 나누었다.
"사실 상무님을 뵙자고 한 것은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어섭니다."
"아, 그러시군요. 무슨 일이죠?"
이윽고 노조 위원장이 본론을 꺼냈다. 김 상무는 무슨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을 것 같아 긴장한 채 주 위원장을 쳐다보았다.
"다음 달에 우리 지역 노조에서 주관하는 노사정 단합대회가 있습니다. 지역에 있는 회사의 노조 대표와 경영자 대표 그리고 관계 공무원이 참석하는 큰 행사죠. 한 이백여명 참석할 것 같은데, 함께 등산하고 식사하고 족구시합을 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 행사에 회사에서 식사비를 찬조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래도 우리 회사가 지역에서 큰 회사인데 그런 행사를 하면서 먹은 것을 각자 계산하라고 할 수는 없잖겠습니까?"
아하!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구나! 김 상무는 일단 큰 일은 아닌 것 같아 안심하였다. 김 상무가 노조 관련 업무를 맡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담당 팀장으로부터 듣기로는 노조 쪽에서 금전적 요구를 가끔 하였고, 회사가 들어주면 한동안 노사관계가 원활하게 잘 돌아간다고 했다. 차에 기름을 넣듯이 딱 넣은 기름만큼 가는 관계. 그게 노사관계라고 들었다.
"대략 얼마 정도 나올까요?"
"한 오륙백 정도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알겠습니다. 지원될 수 있도록 사장님께 잘 설명드리겠습니다."
단풍이 들락 말락 하는 화창한 가을 어느 날, 김 상무는 지역 노사정 단합대회에 J기업의 경영자 대표로 참석하였다. 노조 쪽에서는 주 위원장과 부위원장 2명 그리고 여성부장이 참석하였다. 다른 회사에서도 비슷한 규모로 참석하였고, 시와 구청의 담당 공무원도 여럿 참석하였다. 등산로 입구에서 간단한 발대식이 있었는데, 노사정 각 대표들의 인사말이 있었고 김 상무에게도 마이크가 넘어갔다. 아마도 가장 큰 비용이 들어가는 식사비용을 찬조하기로 한 덕분인 듯했다. 김 상무는 '노사의 단합과 상생을 기원하면서 좋은 날 야외에 나와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을 당부한다'고 하였다. 참석자들은 수건과 물병 그리고 간단한 먹거리가 든 봉투 하나씩을 들고 삼삼오오 등산로를 따라 올랐다.
"김 상무님, 상무님은 이런 자리가 처음이시죠?"
김 상무 옆으로 회사 여성부장이 따라붙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노조집행부에 꽤 오랫동안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 늘씬한 몸매에 성격이 활달하고 붙임성도 좋았다.
"아, 양 부장님. 저는 처음인데 노조에는 이런 행사가 많이 있나 보죠?"
"예. 연합행사가 가끔 있어요.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거기서 다른 쪽 사람들도 만나고 정보도 공유하고 그래요."
"그렇군요. 노조에서 대외활동도 열심히 하는군요."
김 상무는 여성부장과 동행하며 노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김 상무가 딱히 말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주로 듣고, 성격이 활달한 그녀가 말을 많이 하였다. 그녀는 노조 업무가 처음인 김 상무를 생각해서인지 노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덕분에 김 상무는 노조집행부 사정과 회사 내 현 집행부와 대립되는 노조원들의 동태까지 파악할 수가 있었다.
"여기서 잠시 목이나 축이고 가요."
"예, 그러시죠."
등산을 하면서 계속 말을 해서인지 입도 마르고 숨도 턱밑에 찬 양 부장이 쉬어가자고 했다. 김 상무도 마침 목이 마르던 차라 잘되었다 싶었다. 둘은 등산로 옆 바위에 걸터앉아 목도 축이고 이마에 흐른 땀도 닦았다. 땀에 젖은 그녀의 하얀 목덜미와 숨을 고르느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김 상무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헛헛 기침을 하며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출발할 때 건네받은 봉투에 든 에너지바를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그녀도 에너지바를 한입 베어 물며 김 상무를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등산을 마친 참가자들이 미리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인원수가 많다 보니 식당 안은 물론 앞마당까지 길게 늘어선 식탁 위에는 기본 찬은 물론 소주 맥주 막걸리 등 술이 종류별로 쌓여 있었다. 사람들이 차곡차곡 자리에 앉았다. 노사정 단합대회답게 테이블마다 노사정이 섞여서 앉았는데, 김 상무는 시청 간부와 지역연맹 위원장 그리고 회사 노조 주 위원장과 한자리에 앉았다. 이른바 VIP석인 셈이었다.
"자, 모두 술을 따르고 건배합시다."
지역연맹 위원장이 시청 간부에게 건배 제의를 부탁하였고, 시청 간부의 간단한 인사말 후 건배가 이어졌다. 다음은 연맹위원장 그리고 회사 주 위원장의 건배 제의가 이어졌다. 주 위원장이 김 상무를 일으켜 세워서 '오늘 밥값을 내실 분'이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그는 얼떨결에 환호와 함께 큰 박수를 받았다. 김 상무는 '회사에서 금고를 통째로 들고 왔으니 돈 걱정 말고 맘껏 드시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다시 환호성과 박수가 이어졌다.
"위하여!"
"위하여!"
연이어 술잔이 돌았고, 불판 위에는 오리불고기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모두들 등산 후 목이 컬컬하고 속도 허전하던 차에 술도 음식도 잘 먹었다. 술이 한 순배 돈 후, 다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김 상무에게로 와서 술을 권했다. '덕분에 잘 먹는다'는 인사치레였는데, 주량이 별로 세지 못한 김 상무로서는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양할 수도 없어서 한잔 두잔 받다 보니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어느 정도 취한 모습을 본 사람들이 술 권하는 걸 그쳐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오리불고기에 이어 오리백숙에 뜨끈한 죽까지 먹고 나서야 식사자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식사 후, 식당 옆에 있는 족구장에서 노사정 족구 시합이 열렸다. 참가팀은 모두 여섯 팀. 노측 세 팀, 사측 두 팀, 정측 한 팀. 예선 세 팀 씩 리그전에 이어 조별 1위 팀끼리 결승전. 당연히 상금도 있었다. 김 상무는 술도 취했고 원래 운동신경이 둔해 선수로 뛸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밥값을 낸 죄로 의무 출전명단에 올라 사측 2팀에 편성되었다. 그리고 첫 상대팀으로 지역연맹 위원장이 포함된 노측 3팀을 만났다. 한쪽에서는 족구 경기가 열리고, 한쪽에서는 파전에 막걸리 파티가 열리고. 한 점 한 점에 구경꾼들의 함성이 터져 나오고, 부어라 마셔라 흥청망청 노사정 단합대회가 벌겋게 익어가고 있었다.
"상무님, 일어나셔서 이것 좀 드세요."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 통에 김 상무가 눈을 번쩍 떴다. 여기가 어디지? 김 상무는 순간적으로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는 그녀, 양 부장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헉! 김 상무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휴! 식당 안이었다. 식사가 끝난 지저분한 식탁이 여전히 놓여있는 가운데 한쪽 구석에 자신이 앉아 있었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드셨어요? 자, 이거."
그녀가 드링크 병과 알약을 내밀었다. 술 깨는 약이었다. 김 상무가 그녀로부터 약을 받아 들며 기억을 가다듬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와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족구시합을 할 때 김 상무는 뒤에서 받는 것은 자신이 없어서 앞쪽에서 공격수 역할을 맡았다. 프로도 아니고 아마추어 시합인 경우 화려한 공격보다는 수비를 하면서 실수를 줄이는 게 승리의 열쇠였다. 게다가 다들 술에 취하여 백 프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김 상무도 마찬가지였는데, 오히려 술에 취한 게 그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그의 공격이 대부분 공이 발에 정확하게 맞지 않고 빗맞아서, 상대가 예상치 못하는 곳에 힘없이 떨어지는 바람에 번번이 득점에 성공하였다. 마치 취권을 하듯 허우적대면서도 희한하게 점수를 내는 그의 동작에 사람들이 배꼽을 잡으며 박수를 쳤다. 그런데 1세트를 무난하게 이긴 뒤 2세트에서 문제가 생겼다. 자신의 득점력에 한층 고무된 김 상무가 멋진 공격을 보여주겠다며 크고 강하게 발을 휘둘렀고, 여지없이 헛발질을 한 그는 중심을 잃고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바로 선수교체.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미 기력을 다 소진한 김 상무는 겨우 부축을 받고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잠시 쉬어야겠다고 방으로 들어간 그는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양 부장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던 것이었다.
"고마워요, 양 부장님. 제가 오늘 술이 과했네요."
"상무님, 노조하고 술 마실 때는 주는 대로 다 받으시면 안 돼요. 사람들이 다들 주량이 보통 센게 아니거든요. 받다 보면 자기 주량만 생각하고 끝도 없이 권해요."
"그렇군요. 오늘 확실하게 경험했네요. 정말 고마워요, 양 부장님!"
연민인지 동정심인지 김 상무를 안됐다는 듯 쳐다보던 양 부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여전히 술이 덜 깬 김 상무에게는 그런 그녀 모습이 곱디고운 천사표로 보였다.
* 김 상무와 양 부장과의 사연은 다음화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계가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밥값 지불과 관련하여 김영란법을 들먹일 이야기도 아님을 첨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