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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Mar 06. 2024

저녁놀이 아름답다는 상상(상)

오랜만에 쓴 단편소설 #1/3



울긋불긋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 어느 날, 봉식은 새로 이사한 집 근처 공원 초입에 있는 벤치에 홀로 앉아있었다. 노랗고 빨간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그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보이는 따스한 날이었다. 멍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던 봉식이 문득 고개를 어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짙푸른 하늘에 눈이 시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봉식은 눈을 찡그린 채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바람이 불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 단풍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그중 하나가 그의 무릎 내려앉았다. 그가 단풍잎을 집어 들었다. 여전히 푸른빛이 반 이상 남아 있는 단풍잎.


"아직 떨어질 때가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쩌다가 버림받았니?"


봉식은 그 단풍잎이 마치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에도 여전히 청춘의 푸른빛이 남아 있는데...'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단풍잎을 자신의 등산 재킷 주머니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봉식은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오가는 틈에 섞여 들었다. 그의 가슴 한복판은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지만,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그들 중 한 명인 것처럼 평범하게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봉식의 옆으로 노란색과 초록색이 섞인 등산복 차림의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나갔다.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두 손을 꼭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봉식의 눈에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분명해 보였다.


"참 좋을 때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야."


봉식은 저만큼 앞서가는 그들이 부러운 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봉식은 아내 연홍을 고등학교 친구 달환의 결혼식장에서 처음 보았다. 봉식이 결혼식 사회를 봤고, 그녀는 신부의 대학교 동창이었다.


그 시절은 예식장에 뷔페식당이 있어서 한 곳에서 하객들이 식사를 하고  문화가 아니었다. 대신 예식장 주변의 식당 몇 곳을 예약하여, 가족이나 친지가 식사하는 곳, 신랑 신부의 우인들이 식사하는 곳 등으로 구분하여 하객을 맞았다. 그렇게 해서 신랑 신부 우인 삼십여 명이 한 식당에 모이게 되었는데, 미색 블라우스에 남색 스커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연홍이 봉식의 눈에 들어왔다. 동창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밝게 웃는 그녀의 빨간 입술 사이로 하얗게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가 고와 보였다.


"우리 모두 다방으로 자리를 옮겨 커피 한잔할까요?"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봉식이 제안 하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랑 신부 우인들끼리 뒤풀이를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신랑으로부터 받은 돈 봉투를 마침 그가 갖고 있었다.


"전 다른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아쉽게도 그녀는 뒤풀이 장소에 참석하지 않고 가버렸고, 봉식은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다방을 거쳐 나이트클럽으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봉식은 달환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연락하였다. 그리고 연홍을 소개해 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해서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조용한 다방에서 둘이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연홍도 그가 싫지는 않았던지 만남을 이어갔고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사귀는 동안 둘 사이가 늘 달콤했던 것만은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서서히 익어갔고, 만난 지 일 년 후 마침내 둘이 결혼하게 되었다. 가진 재산 없이 시작한 결혼생활은 힘들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에 견딜 수 있었고, 아들딸을 낳아 키우며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려 나갔다.




봉식이 아내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등산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바로 달환이었다. 봉식은 잠시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그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였다. 봉식은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러마고 하였다. 차라리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모르겠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연락해 온 달환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찜찜하였다.


통화를 끝낸 봉식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삼십 분 정도 올라가자 벤치 몇 개가 놓여 있는 공터가 나왔다. 한동안 집에만 박혀있어서 그런지 겨우 삼십 분 등산에 숨이 가빴다. 그는  벤치에 앉아 들고 생수로 목을 축이며 가쁜 숨을 쉬었다.


구수하고 은은한 커피 향이 봉식의 코를 타고 들었다. 옆 벤치에 앉은 노부부가 과일을 먹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봉식은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욕구였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봉식이 코를 벌룸거리는 모습을 봤는지, 머리가 희끗한 남자가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라 미소 지으며 봉식에게 건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받아 든 그는 한 모금을 입에 물었다. 손으로 전해진 따뜻한 감촉이 은은한 향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겨우 커피  모금 마셨을 뿐인데 축 처졌던 기분이 조금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봉식은 달환과 둘이 장어구이 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동안 복잡했던 가정사로 사람들 만나기를 꺼렸던 그였지만, 그래도 달환은 그러한 사정과 관계없이 마음을 터놓고 술 한잔할 수 있는 친구였다. 달환이 봉식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친구야, 도대체 어떻게 되었길래 그 지경까지 갔냐?"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뭐가 잘못됐는지 말이야."


봉식이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너도 마찬가지지만 나도 일 열심히 한 것밖에 없다. 가진 것 없이 몸 하나로 시작해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 지금껏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엔 다 떠나버리고 혼자 남았다. 그동안 내가 인생을 헛살았던 것 같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우리 남자들이 다 그렇지. 너나 나나 이 나이 먹도록 열심히 살았지 않냐?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데?"


달환이 봉식의 빈 잔을 채우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면서 물었다.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봉식의 씁쓸한 대답이 달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십 년 넘게 이어온 우정이 어딘데, 달환은 어떻게든 봉식을 위로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식아, 일단 가끔 나랑 만나자. 어디 바람이라도 쐬고 오는 건 어때? 내가 한번 일정을 잡아볼게."


"고맙다, 친구야. 그래도 널 만나니까 위안이 좀 된다."


둘은 소주잔을 부딪히고 꿀꺽 목으로 넘겼다. 그리고 알맞게 구워진 장어를 매콤한 소스에 찍어 입에 넣었다. 둘은 장어구이를 안주삼아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된장찌개에 밥까지 먹고서 식당을 나왔다. 봉식은 오랜 벗과의 만남에 정말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봉식은 밤늦게 달환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니 시커먼 어둠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휑한 거실에 소파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주방 식탁 위에는 치우지 않은 빈 그릇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티브이를 켰다. 화면에는 죽은 지 한 달이 넘은 모녀의 시신이 한 빌라에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관 앞에는 각종 고지서와 독촉장이 수북이 쌓인 채로.


"쯧쯧. 어쩌다 저런 일이..."


봉식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는 티브이를 끄고 눈을 감았다.




"우리 이제 헤어져요. 더 이상 당신과 못 살겠단 말이에요! 난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 거예요."


연홍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을 때 봉식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화가 치솟았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누가 누구 보고 헤어지자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좋아, 나도 바라는 바라고! 나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 살 거라고!"


봉식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날로 그녀는 옷 가방을 챙겨서 집을 나갔고 집에는 봉식 혼자 남았다. 서른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을 불과 며칠 앞둔 날이었다.


봉식은 생각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억울하였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데. 정말 죽도록 일만 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상사의 면전에 사표를 집어던지고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적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가족이 눈앞에 어른거려 차마 그러질 못하였다. 대신 '잘못했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거래처 접대를 하면서도 상대방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웃음을 지으며 자신보다 한참 어린 상대방한테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술을 따랐다. 인허가를 받기 위해 관공서에 드나들 적에는 뒷돈을 찔러주면서 굽신거렸다. 그들은 당연하게 해주어야 하는 사안에도 번번이 트집을 잡아 지연시키기 일쑤였고, 한시가 급한 봉식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몸을 낮춰야만 하였다.


봉식이 직장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때는 동남아 밀림 속에서 댐을 건설하는 공사 현장에 파견 나가 있었던 십 년 가까운 세월이었다. 낯선 타국 그것도 도심에서 차를 타고 네 시간은 족히 들어가야 하는 오지였다. 컨테이너로 꾸민 가건물에서 지내며 말도 안 통하는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힘들게 일해야 했다. 그곳은 회사에서 직원들이 제일 꺼리는 자리였는데, 그는 자원하여 갔다. 바로 돈 때문이었다. 파견 수당이 거의 월급만큼 나왔다. 그 덕에 가족들은 돈 걱정 없이 살았고, 아이들은 필요한 과외를 받으며 원하는 대학교에 갈 수 있었다.


봉식은 겨우 일 년에 한 번 보름간의 휴가를 받아 한국에 나올 수 있었다. 아이들을 보는 건 그때뿐이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커가는 걸 보면서 타국에서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시기에 서로 떨어져 지내게 된 탓으로 봉식과 아이들과의 관계는 점점 서먹해졌다. 아내와도 남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그냥 호적에 메마른 잉크자국으로 남아있는 관계로 남는 듯했다.




봉식은 삼십육 년의 직장생활 끝에 작년에 퇴직하였다. 이제는 편히 쉬고 싶었다. 그동안 소원했던 아내 연홍과 관계도 재정립하고 함께 여행도 다니며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매일 밖으로 나돌았다. 무슨 모임이 그렇게 많고 무슨 행사가 그렇게 많은지, 그녀는 그가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바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허구한 날 혼자 집을 지키는 외톨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연홍은 봉식과 자주 부딪혔다. 연홍은 집에만 있으려고 하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 혼자 지내던 시간에 익숙해진 연홍으로서는, 거의 밖으로만 돌던 사람과 하루 종일 같이 있는다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일단은 서먹했다. 게다가 그는 집안일을 전혀 거들 줄 몰랐다. 그녀가 삼시 세끼를 차려주어야 했다. 그는 자기가 먹은 밥그릇 한번 설거지하는 일이 없었고, 집안청소는 물론 일주일에 한 번 화분에 물 주는 것까지 모르는 체했다. 심지어 밥 먹고 나서 물 심부름, 커피 심부름까지 그녀가 수발을 들어야 했다. 나이 들어 다시 맞은 모진 시집살이처럼 느껴졌다.


연홍은 봉식이 퇴직 후 몇 달은 그래도 오랫동안 고생을 하였으니 집에서 쉬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연홍은 그에게 나가서 소일거리를 찾아보든지, 하다못해 친구라도 만나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연홍은 소파에 늘어져 하루 종일 티브이만 보고 있는 의 모습이 싫었다.


연홍과 봉식의 대화가 점점 줄어들었고 한 번씩 오가는 대화에도 가시가 돋았다. 그런 날이 반복되자 그녀는 그를 피해 밖으로 나가는 일이 늘어났다. 서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사소한 일이 말다툼으로 이어지고 얼굴을 붉히게 되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피해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봉식은 그런 그녀가 더 못마땅하였다. 문제가 있으면 대화로 풀어야 하는데, 그녀는 대화 자체를 회피하였다. 조금만 잔소리를 하면 이내 그녀의 얼굴에 '그만하라'는 표시가 역력했고, 곧바로 자리를 떠 버렸다. 그래도 봉식이 회사생활을 할 때는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소통을 잘한다는 평판을 받았었는데, 그게 집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자신과 아내, 두 사람 밖에 없는데 말이다. 


벽 보고 이야기하기. 딱 그 짝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둘은 각자 돌아서서 각각 다른 벽을 마주하는 순간들만 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벽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 다음화 중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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