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놀이 아름답다는 상상(중)
어느 노부부 이야기 #2/3
봉식과 연홍이 갈라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아들 정환 때문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연구원으로 잘 다니던 정환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는 선배와 사업을 한다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핫한 아이템을 개발한다고 했다. 봉식은 펄쩍 뛰며 그런 아들을 만류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봉식이 세상 변하는 걸 모른다고 타박을 들었다.
정환은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선배와 공동투자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업이라는 게 책상에서 머리로 그렸던 것과 현실은 많이 다르기 마련이라, 제대로 된 제품의 상품화가 지연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불어닥친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판로개척도 여의치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매출이 오르지 않자 바로 자금에 문제가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동업자가 손을 털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정환 혼자 자금 소요를 떠안아야 하는 처지에 몰리고 말았다.
연홍은 봉식에게 자금을 마련해 주자고 하였다. 부모로서 아들이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도와주는 게 마땅한 도리라고 하였다. 봉식이 '여유자금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 살기도 빠듯하다'고 하자, 연홍은 '아버지가 되어서 어떻게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냐?'고 봉식을 질책하였다. 그러면서 살고 있는 집을 팔자고 하였다. 안 그래도 둘이 살기에 집이 크다며 작은 곳으로 옮기고 돈을 마련하자고 하였다. 잘못하면 아들 내외와 어린 손자가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며 봉식을 닦달했다.
봉식은 지금껏 돈을 벌어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온 힘을 다 썼는데, 이제 와서 그 공은 고사하고 인정머리마저 없는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야 봉식인들 왜 없으랴만 연홍과의 말다툼에 그는 반발심이 생겼다. 게다가 직접 찾아와서 부탁하지 않고 제 엄마 뒤에 숨어서 부추기는 아들이 얄미웠다. 하기야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한다고 하였을 때 봉식이 극구 말렸으니, 봉식에게 손을 내밀 염치가 없는 일이기는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정이 더 악화되었다. 정환의 회사가 부도 위기에 몰렸고 담보로 제공한 아파트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연홍 말대로 아들 가족이 길거리로 나앉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마음이 급해진 연홍은 봉식에게 자기 지분을 요구했다. 재산 형성에 자신의 공이 컸다며 절반을 달라고 하였다. 봉식이 외국에 있을 때 알뜰살뜰 살림을 살아 돈을 모았고, 특히 자기가 선택해서 구입한 아파트가 세 배나 뛰었으니 사실상 재산형성의 가장 큰 공은 자기가 세운 것이라고 하였다.
사태가 거기까지 이르자 봉식은 연홍이 꼴 보기 싫어졌다. 아니 엄마와 한통속이 되어 자기들끼리 뭉치는 자식들도 보기 싫어졌다. 그래서 봉식은 다 정리하기로 하였다. 다 줘버리고 편하게 살자 싶었다. 가진 게 없으면 손 벌리는 사람도 없겠지 싶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고 변두리 동네의 낡은 소형 아파트로 옮기게 되었다.
그 와중에 봉식은 또 한 번 배신감을 맛봐야 했다. 연홍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아파트를 담보로 돈을 빌려 아들에게 준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비록 아파트 명의가 연홍앞으로 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최소한 자신과 상의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봉식은 이미 집안의 허수아비로 취급되고 있었다. 있으나 마나 한 존재. 그게 결정적인 사건이 되어서 둘이 헤어지게 되었다. 봉식은 낡고 작은 변두리 아파트와 약간의 현금만 남기고 처분 재산의 대부분을 연홍에게 넘겨주었다. 아내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식구이고 핏줄인데 그들이 돈 때문에 힘들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 그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게 평생을 열심히 일했던 봉식의 가장 큰 목표이기도 하였다.
졸혼. 모두 다 떠나버렸다. 아내도 떠났고 자식들도 모두 떠났다. 자기에게 그런 일이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인생을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 남은 건 빈 몸뚱이 하나, 바로 자신. 봉식은 마음이 허했다. 마음이 오그라들고 남들 대하기가 겁이 났다. 특히 자기를 아는 사람들, 그들을 만날까 두려웠다. 간혹 지인들로부터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다. 할 말도 없었고 안부를 물을 힘도 없었다. 이삼일에 한번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외출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아직 죽을 마음은 없었고, 죽더라도 굶어 죽기는 싫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냈던 봉식은 굶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랬기 때문에 가족들을 먹여 살린다는 일념으로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지도 몰랐다. 그랬거나 저랬거나 이제 다 끝난 이야기지만.
봉식은 한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래도 먹는 게 힘이 되는지 꼬박꼬박 세끼를 챙겨 먹으며 시간이 흐르자 마음이 조금은 정리되는 것 같았다. 슬슬 몸이 근지럽고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창밖으로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하얀 구름이 점점이 떠 있는 게 보였다. 봉식은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길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아파트 뒷산 등산로 초입에 조성되어 있는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볕을 쬐기에 딱 좋은 벤치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 봉식은 하릴없이 거기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세월을 죽이는 날들이 많아졌다.
봉식이 친구 달환과 만나 술 한잔 하며 회포도 풀고 근황도 전한 며칠 후,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친구야, 다음 주에 시간이 어떠냐? 우리 관광버스 타고 1박 2일로 홍도로 여행이나 다녀올까?"
"그래, 알았다. 머리도 식힐 겸 그러지 뭐."
봉식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크게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맨날 공원 벤치에만 앉아있고 싶지는 않았다. 친구 달환이라면 같이 있는 게 부담스럽지 않고, 새로운 공기도 맡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탁 트인 바다를 보고 비릿한 바다내음을 맡으면 기운이 날까?
그렇게 해서 봉식은 달환과 여행길에 올랐다. 관광버스에는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탔는데, 나이 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오르자 버스는 속도를 붙여 씽씽 달려 나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넓은 들에는 곡식이 노랗게 익어갔고, 그 뒤로 푸른 산과 청명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봉식은 탁 트인 풍경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관광버스는 세 시간을 달려 목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유달산 주차장에 내려놓았다. 화장실에 들러 생리현상을 해결한 봉식은 달환과 함께 주변 구경에 나섰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목포 시내의 모습과 바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를 낀 항구도시는 뭔가 모를 여유로움과 포근함이 느껴졌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비릿한 바닷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관광버스를 같이 타고 온 일행들이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무리들 중 한 여자가 봉식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일행이 세 명이었는데 다들 오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그녀들은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펴 하트모양을 하고 포즈를 취했다. 핸드폰을 건네자 그 여자가 봉식에게도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였다. 옆에 있던 달환이 봉식을 잡아끌고 바다를 배경으로 섰다. 나이 든 남자 둘이 뻘쭘하게 서서 그녀들처럼 손가락 하트를 그렸다. 화면 속의 봉식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목포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일행은 쾌속선으로 옮겨 타고 홍도로 향했다. 배는 바닷물을 양옆으로 가르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봉철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여행 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두 시간 반 정도 걸린 끝에 배가 홍도에 닿았다. 배정받은 숙소에 여장을 푼 봉식과 달환은 가벼운 복장으로 숙소를 나섰다. 첫날은 자유시간으로 해안가를 산책하거나 깃대봉에 올라 홍도 주변 경치를 둘러보라고 하였다. 둘은 깃대봉에 오르기로 하였다. 산을 쉬엄쉬엄 오르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가 않았다. 게다가 공기도 맑고 바다 풍광도 좋아서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산에서 내려온 둘은 해변의 한 식당에서 싱싱한 해물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좋은 친구와 여행도 하고, 경치 구경도 하고, 마주 앉아 술도 한잔 하고. 더없이 마음이 편해진 봉식이 달환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고맙다, 친구야! 네 덕분에 좋은 곳으로 여행도 오고 함께 술도 한잔하고 그러네?"
"봉식아! 아무쪼록 맘 편하게 먹고 남은 인생 즐기며 살자. 내가 네 곁에 있어 줄게. 우리 앞으로 많이 다니자."
둘이 술잔을 가볍게 부딪히고 나서 술잔을 쭉 비웠다. 그리고 싱싱한 해물을 한 점씩 집어 입에 넣었다.
"아이고 여기들 계셨군요!"
오전에 유달산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던 여자들이 식당으로 들어오며 아는 체를 하였다.
"구경 잘하셨어요? 괜찮으시면 합석하셔서 같이 술 한잔하실래요?"
달환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살짝 떼며 말했다.
"그럼 그럴까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여자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달환이 자리를 봉식 옆으로 옮겼고 여자들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자 둘, 여자 셋. 남녀가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주로 여자들이 이야기를 했고, 봉식과 달환은 들었다. 어디서 재미난 이야기들을 배우기라도 했는지 다들 입담이 대단하였다. 여자들이 말도 많았고 술도 제법 잘 마셨지만 그렇다고 예의가 없거나 밉상도 아니었다. 특히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핸드폰을 건넸던 여자의 친화력이 좋아 분위기는 한결 화기애애하였다.
그렇게 그날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오전에는 유람선에 올라 홍도 일주를 하였다. 봉식과 달환은 하루 만에 친해진 그녀들과 어울려 멋진 기암절벽과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남들이 보면 원래 같은 일행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일행은 홍도 관광을 마치고 다시 쾌속선에 올라 흑산도를 거쳐 목포로 돌아왔다. 그리고 타고 왔던 관광버스에 올라 귀갓길에 올랐다.
봉식은 밤늦은 시간에 아무도 맞아주는 사람이 없는 텅 빈 집에 도착하였지만, 그날만큼은 쓸쓸하지 않았다.
며칠 후, 봉식은 홍도 여행 때 알게 된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봉식은 원래 말이 많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간 혼자 외롭게 지낸 탓인지 말을 재미있게 하는 그녀에게 끌렸었다. 그래서 은근하게 연락처를 묻는 그녀의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주었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었다.
"김 사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서 전화드렸어요."
"아, 장 여사님! 장 여사님도 잘 지내셨나요?"
"네, 저야 잘 지냈죠. 호호호."
그날 오후 시내 한 카페에서 봉식은 장 여사를 만났다. 그녀는 여행 때와는 다르게 짙은 남색 투피스에 미색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검은 구두를 신은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얼굴에 활짝 미소를 띠고 봉식을 반겼다. 그날 봉식은 장 여사와 커피도 마시고 식사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그 후로 장 여사로부터 가끔 연락이 왔고 둘의 만남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친밀한 이성 관계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외롭게 지내던 봉식은 말벗이 필요했고, 장 여사는 그 역할 이상으로 봉식을 대했다. 나중에는 함께 거리를 걸을 때 살짝 봉식의 팔짱을 끼기도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장 여사에 대한 봉식의 감정도 조금씩 변하는 듯하였다.
12월에 막 접어든 어느 날, 봉식은 오랜만에 달환을 만났다. 고깃집에서 고기를 구워서 술을 마셨다. 소주 한잔을 털어 넣고 고기 한 점을 씹으며 달환이 입을 열었다.
"홍도 여행에서 만난 장 여사는 요즘도 만나냐? 혹시 너 좋다고 고백하지 않던?"
"아니,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봉식이 술잔을 비우고 말을 이었다.
"하도 다정하게 대해서 혹시 내가 마음에 있나 싶었는데 보험 얘기를 꺼내더라고. 나이 들수록 실손보험인가 뭔가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래서 하나 들었지. 설명을 듣고 보니 괜찮은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럼 장 여사가 보험 영업사원이었나?"
"그건 아니고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더라고. 친한 친구라고 하면서. 그 여자는 정말 멋지고 세련되게 생겼더라고. 그 여자 권유로 실손보험하고 생명보험도 하나 더 들었어."
"허어, 완전 보험 영업이 목적이었구먼. 쯧쯧."
달환이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봉식이 술을 한잔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한 번은 장 여사가 나보고 여윳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묻는 거야. 자기 딸이 무슨 투자회사에 다니는데 수익률이 엄청 좋은 상품이 나왔다고 하면서. 분기별로 원금의 20%를 배당금으로 돌려준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감을 잡았지. 내가 맘에 들어서 만나자고 했던 게 아니라고."
그랬다. 장 여사는 다른 목적이 있어서 접근하였던 것이었다. 그 이후로 봉식은 장 여사의 연락을 피했다. 그래도 봉식이 회사생활을 오래 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인데, 그런데 넘어갈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한동안 이어지던 장 여사의 전화며 문자 메시지가 뜸해지더니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끝났다.
* 이야기는 하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