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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Mar 11. 2024

저녁놀이 아름답다는 상상(하)

단편소설, 가족 이야기 #3/3



연말이 되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웃집들과 달리, 웃을 일도 말할 상대도 없는 봉식에게는 적막날들만 계속되고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불고 흰 눈이 내리고, 더 이상 공원에도 나갈 수 없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세월을 죽이고 있던 어느 날, 죽은 듯 멈춰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바로 달환이었다. 달환이 크리스마스이브 날 제주도에 가자고 하였다. 아는 지인이 펜션을 하는데, 거기서 겨울 낚시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며칠 쉬다가 오자고 하였다. 봉식이 물었다.


"넌 가족하고 보내야 하지 않냐?"


"야, 봉식아! 널 두고 어떻게 나 혼자 보내겠냐? 우리가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 연말만큼은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지내!"


봉식은 눈물이 핑 돌았다. 달환의 그 마음이 고마웠다. 아내도 피붙이도 전화 한 통 없는데, 그래도 사십 년 우정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다. 달환의 목소리를 듣고 봉식은 벗어나고 싶었다. 혼자 갇혀있는 울타리를 탈출하고 싶었다.


"그래, 가자! 달환아 고맙다."


달환과 여행을 떠나기로 한 전날, 봉식은 창고에서 여행용 가방을 꺼냈다. 오랜 세월 동안 여정을 함께 해온 낡은 가방이었다. 갈아입을 속옷과 여분의 겉옷 그리고 세면도구를 챙겼다. 시간 날 때 읽을 책도 두 권 담았다. 그런데 지퍼를 잠그고 가방을 드는데 손잡이가 툭 하고 떨어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바퀴도 한 개 져 있었다. 수명이 다한 것 같았다. 창고에 수화물용 큰 캐리어가 하나 더 있었으나 그것을 들기에는 너무 불편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봉식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백화점은 연말을 맞아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손님들 그리고 손에 손을 마주 잡은 연인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즐거운 표정이었다. 경제가 어려워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팍팍해졌다고 하는데 그곳은 예외인 것 같았다. 봉식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기내용 가방 외에도 두툼하고 따뜻해 보이는 색 패딩 점퍼 하나를 다. 아무래도 바닷가 바람이 꽤나 추울 것 같아서였다.


필요한 것을 구입한 봉식은 나온 김에 밥이나 먹고 자고 생각하고 식당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뜨끈하고 얼큰한 짬뽕 국물이 생각났다. 봉식이 중식당으로 가기 위해 중간에 있는 일식당을 지나는데, 얼핏 창문을 통해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보니 바로 연홍이었다. 그리고 아들 내외와 손자까지 있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이야기꽃을 피우며 음식을 먹는 모습이 아주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봉식 자신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연홍이 집을 나간 이후 아들은 물론 며느리도 전화 한번 없었다. 미국에 유학 중인 딸로부터는 전화 한 통이 왔었다. 엄마와 헤어진 걸 걱정하며 밥을 꼬박꼬박 잘 챙겨 먹으라고 하였다. 그게 전부였다. 나머지는 봉식이 어떻게 지내는지, 밥은 먹고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봉식에게 가족이 있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봉식의 눈앞이 흐려졌다. 봉식은 혹시라도 자신의 모습을 들킬세라 고개를 떨구고 몸을 돌려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봉식은 집 앞 편의점에서 소주 두 병을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제는 익숙해진 시커먼 어둠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불을 켰다. 아무도 없는 덩그런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봉식은 라면 한 개를 끓여서 냄비 채 들고 와 소파 테이블 위에 놓고 티브이를 켰다. 노인 빈곤에 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봉식은 잔에 소주를 따라 쭉 들이켰다. 술이 썼다. 한 잔을 더 따랐다. 라면 한 젓가락을 먹고 김치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다시 한잔을 마시고 김치를 입에 넣었다. 화면에는 일흔이 다된 나이에 쪽방촌에 혼자 살며 막노동을 나가는 한 남자가 나와 고달픈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봉식은 술잔을 다시 들었다. 소주 두 병을 다 비운 봉식은 거실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오싹하고 느껴지는 한기에 봉식이 눈을 떴다. 여전히 캄캄한 가운데 뭔가 수상한 인기척이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주방 쪽에 사람 형상이 희뿌옇게 눈에 들어왔다.


".. 누구냐!"


봉식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검은 형상이 빠르게 봉식에게로 다가왔다. 봉식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검은 형상은 남자였다. 봉식의 눈에 그 남자의 눈동자 들어왔다. 그리고 치켜든 오른팔에 들려 있는 무언가가 번쩍 빛나는 게 보였다. 순간 봉식은 머리에 둔탁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깊은 심연 속으로 꺼져 내렸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이른 아침, 달환은 공항에서 봉식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이미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봉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침 첫 비행기로 떠나기로 했는데 이미 비행기도 놓친 뒤였다. 달환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어제 봉식과 통화를 하여 오늘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안 나올 이유가 없었다. 혹시 사정이 생겼다면 연락이 왔어야 했다. 하지만 연락도 없고 전화도 받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봉식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뭐라더라? 무궁화아파트라고 했지?"


달환은 서둘러 택시를 타고 봉식이 살고 있다는 아파트로 향했다. 사실 달환은 아직 봉식의 집에 가 보지를 않았었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계속 전화를 하였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봉식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달환은 인터넷에서 무궁화아파트 관리사무소 연락처를 찾았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입주자 중 김봉식의 집을 찾아가 이상유무를 확인해 달라고 하였다. 서둘러 달라고 재촉하였다.

 

달환이 무궁화아파트 입구에 막 들어서는데 119 구급차 한대가 경광등을 반짝이며 빠르게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달환의 전화벨이 울렸다. 바로 아파트 관리사무소였다. 봉식이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고 하였다. 방금 전 그 구급차인 것 같았다. 달환은 택시 기사에게 차를 돌려 그 구급차를 쫓아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봉식은 응급실을 거쳐 바로 수술실로 옮겨졌다. 다행히 숨이 붙어있었고 또 다행히도 낮시간이라 병원에 전문의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달환은 병원 수술실 앞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기도하였다. 봉식이 수술을 마치무사히 깨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나마 자신이 봉식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기에 망정이지, 평상시 봉식 혼자 있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아찔하였다. 정신을 차린 달환은 아내에게 전화하여 봉식의 상황을 설명한 후 친구인 연홍에게 연락하라고 하였다. 당연히 봉식의 가족에게는 알려야 했다.


연홍과 아들 정환이 병원에 도착하였을 때, 수술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수술실 앞에서 달환에게 자총지종을 전해 들은 연홍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 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자기가 집을 팔자고 해서 그곳으로 이사 게 된 것이 아니었던! 그냥 살던 곳에서 살았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정환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연홍을 위로하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책하지 말고 아버지가 무사히 깨어나기를 기도 하자고 하였다.


수술은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끝났다. 봉식은 머리를 붕대로 칭칭 감고 몸에 링거를 주렁주렁 매단 채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의식이 여전히 없는 상태였다. 의사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하였다. 뇌혈관의 출혈을 막았고 고인 피도 거의 제거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일단 이삼일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였다. 조금만 시간이 더 지체되었어도 거의 가망이 없을 뻔하였는데 천만다행이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달환이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통하여 확인토록 한 게 봉식의 목숨을 건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날 저녁 티브이에는 한 아파트에 강도가 들어 혼자 사는 남자를 둔기로 폭행하고 금품을 털어 달아났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에는 아파트경비원이 인터뷰하는 모습이 나왔다.


"이곳에 이사 온 지 서너 달 되었는데 남자 혼자 사는 것 같더라고요. 다른 가족은 전혀 보지 못하였습니다."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기자가 말을 이었다.


"경찰은 범인이 도시가스 배관과 벽을 타고 3층 뒷 베란다를 통하여 침입한 것으로 판단하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평소에도 우범지대로 혼자 사는 노약자들이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주민들이 CC 카메라 설치와 순찰을 강화해 줄 것을 관계 당국에 여러 번 요청하였으나 여전히 무시되있다고 합니다."

 



봉식은 중환자실에서 이틀이나 지난 후 겨우 의식을 회복하였다. 연홍은 면회시간에 봉식을 찾았다. 여전히 집중치료가 필요한 상황으로 가족에 한하여 하루에 한 번 환자를 볼 수 있었다. 연홍이 봉식의 손을 잡았다.


"여보,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봉식의 눈이 붉게 충혈되더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만 여전히 온전한 상태로 돌아오지는 못했는지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입을 달막달막 하였으나 그것이 언어화되어서 밖으로 뱉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인상을 찡그리며 꽤나 힘들어했다.


"여보, 억지로 말하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누군지는 아시겠어요?"


연홍이 재차 물었다. 봉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홍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연홍은 자기도 모르게 후 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연홍은 봉식의 사고가 다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사랑해서 결혼하였고 자식들 낳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왔었다. 행복하고 기뻤던 순간들도 있었다. 봉식이 연홍이나 아이들에게 다정다감하고 살갑게 대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도 책임감 있게 가족을 돌본 사람이었다. 어쩌면 표현 방식이 연홍 자신과 다를 뿐이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그런 남편을 이해하고 끝까지 옆에 있어주었어야 하는 건데'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든 봉식의 초췌하면서도 조금은 낯선 모습을 보는 연홍의 두 뺨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며칠 후, 연홍은 아들 정환과 함께 봉식이 살던 아파트를 찾았다. 봉식의 옷가지며 이것저것 병원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챙기기 위해서였다. 집안에는 여기저기 흐트러진 살림살이와 거실에 남아 있는 그날의 흔적퇴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못 보던 여행용 트렁크와 패딩 점퍼가 놓여 있었다. 장식장 위에 놓여 있는 조그만 사진액자가 연홍의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봉식과 연홍이 공원 벤치에 앉아 활짝 핀 장미꽃을 배경으로 미소 짓고 있는 모습.


"이걸 어디서 찾아냈데?"


연홍이 사진액자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둘이 결혼하기 전 연애 시절에 찍은 사진이었다. 연홍은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서로 사랑하던 시절. 안 보면 보고 싶고,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헤어지고 나서도 금방 또 보고 싶어서 다시 달려가던 순간들. 봉식은 그 시절을 그리워했던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옛날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서 눈에 띄는 곳에 놔둔 것일까? 연홍의 눈물이 뺨을 타고 액자 위로 떨어졌다. 연홍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미안해요, 봉식 씨! 제가 잘못했어요. 우리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요."


연홍은 액자를 품에 앉고 아파트를 나섰다. 거실에 있던 트렁크를 든 정환이 그 뒤를 따랐다. 조금흩날리던 눈발이 점점 굵어져 바닥에 쌓이고 있었다. 연홍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봉식의 상태가 호전되어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연홍이 밤낮으로 그 을 지켰다. 봉식은 말문도 트여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졌다. 이제는 외견상으로 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 봉식은 아내 연홍과 헤어진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서 사고 전까지 연홍과 함께 지내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강도가 들었을 때 연홍은 괜찮았냐고 물었다. 연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봉식이 기억을 못 하는데 굳이 헤어졌다고, 당신 혼자 살고 있었다고 설명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연홍 자신이 봉식 옆을 지키기로 한 이상 오히려 잘되었다 싶었다.


"여보, 아픈 기억은 다 잊고 건강이나 빨리 회복하세요. 우리 남은 인생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봐요."


연홍이 봉식의 손을 꼭 쥐었다. 봉식도 연홍의 손을 꼭 쥐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실내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월 후 따뜻한 봄날, 봉식과 연홍은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 LA로 유학 중인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봉식의 몸이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행이 가능한 정도로 회복되었다. 병원 치료비는 장 여사 덕분에 가입한 실손보험으로 해결하였고, 생명보험에서 받은 보험금으로 여행경비를 충당하고도 돈이 남았다.


아들 정환이 벌인 사업도 고비를 넘기고 조금씩 안정화되고 있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투자한 돈을 모두 회수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새로운 투자자를 확보해서 적어도 더 이상 돈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봉식은 잃었던 기억을 여전히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 연홍과 헤어졌던 기억. 봉식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기억, 잊고 싶었던 기억이었다. 그런데 그것만 잃어버린 듯했다. 하기야 호적에는 빛바랜 잉크자국으로 어엿한 부부로 남아 있으니 그런 기억이 필요 없는 지도 몰랐. 그리고 사실 봉식이 기억을 하는지 못하는지는 영원히 그만 알 수 있는 비밀이기도 하였다.


봉식과 연홍을 태운 747 여객기가 활주로를 힘차게 달려 날아올랐다. 마침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며 저녁놀이 붉게 물든 시간이었다. 시뻘건 해가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구름이며 하늘이며를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비행기가 고도를 높여 갈수록 해가 고개를 들며 더 붉은빛을 토해냈다. 은빛 날개를 반짝이며 공중을 크게 선회한 여객기는 직선을 그리며 붉은 하늘을 가로질러 검푸른 창공 끝으로 사라져 갔다.


<終>   

       


* 이 이야기를 이 시대를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아버지들께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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