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한숨 돌리고 있던 김 상무에게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사장님이 찾는다는 것이었다. 또 무슨 일이지? 설마 노사문제를 잘 해결했다고 금일봉이라도 주시려는 것은 아니겠지? 김 상무는 헛된 상상을 하며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김 상무, 어서 오게. 이쪽으로 앉지. 내가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소파에 앉은 최 사장이 김 상무를 쳐다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김 상무는 최 사장의 표정을 살피며 뭔가 잘못되었나 싶은 생각에 긴장하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사실은... 자네가 회사를 좀 떠나 주어야겠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김 상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갑자기 회사를 떠나라니? 사표를 쓰라는 이야기인가 싶었다. 최 사장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고 D기업에 자네를 임대하기로 했네. 자네가 회사에 꼭 필요하다고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형님께서 어찌나 간곡하게 요청하시는지 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네. 거기 가서 이 년만 있다가 오게. 자네가 돌아올 자리는 내가 마련해 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D기업은 자동차부품을 생산하여 국내외 메이저 완성차업체에 납품하는 회사로, 규모가 J기업의 서너 배 정도 더 컸다. 그곳 오너 겸 사장은 최 사장의 형이었는데, 김 상무와는 집안 행사 때 몇 번 만나 인사만 나눈 정도였다. 그런데 자신을 요구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서 무슨 역할을 맡아 무슨 일을 한다는 말인가?
"이번주내로 전략실장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다음 주 월요일 D기업에 가서 형님을 만나보게."
그렇게 해서 김 상무는 이십 년 넘게 다니던 J기업을 떠나 생각지도 못했던 D기업으로 옮기게 되었다. 말이 이 년 임대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살이에 J기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김 상무는 착잡한 심정으로 사무실로 돌아와 팀장회의를 소집하였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관리부문 직원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김 상무와의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략실장이 상사로 온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었다. 김 상무는 그런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그동안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일주일이 지난 월요일 아침, 김 상무는 D기업을 찾아 또 다른 최 사장을 만났다. 최 사장이 얼굴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김 상무를 반겼다.
"김 상무, 어서 오세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회사에 김 상무가 도와줘야 할 일들이 많아요. 부탁합니다."
"사장님,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 상무는 최 사장과 차를 마시며 한 시간가량 환담을 나눴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전반적인 회사 사정과 업황을 들어보니 뭔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최 사장은 구체적인 업무계획은 기획실장과 의논해 보라고 하였다. 기획실장? 누구지? 김 상무는 궁금해하며 최 사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사장실을 나왔다.
"김 상무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접니다."
사장실 밖에 한 남자가 서서 김 상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중국공장에서 근무하던 최 차장이었다. 김 상무가 태국지사를 둘러보고 나서 폴란드로 떠나기 직전, 사장님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갔던 곳. 중국 청도에서 만났던 바로 그 최 차장.
"아, 최 차장! 아하! 최 차장이 바로 기획실장이군요. 언제 돌아왔어요?"
"한국에 온 지 세 달이 다 되어갑니다. 제가 회사에 돌아오는 조건으로 사장님한테 몇 가지 요구를 하였습니다. 아들이 없는 걸로 생각하던지 아니면 요구사항을 들어주던지 선택하라고 하였죠. 그리고 그중 첫 번째가 바로 상무님입니다. 상무님, 회사를 확 바꾸어야 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상무님이 꿈꾸시던 조직문화, 그게 지금 저희 회사에 절실합니다. 저와 함께 도전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랬구나!'
김 상무는 모든 게 다 이해되었다. 자신이 왜 갑작스럽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방황하던 최 차장, 그런 아들을 보며 안타까워했을 그의 부모. 아들을 회사로 불러들여 후계자로 키우려면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도 같았다.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최 실장의 말을 들은 김 상무는 J기업에서 끝내 하지 못했던 일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Good to Great! 좋은 기업을 넘어서 위대한 기업으로. 직원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회사, 일에서 보람을 찾고 자신의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회사, 그 결과로 성과가 나고 회사가 성장하는 회사. 그리고 그 과실을 직원들에게 돌려주는 회사. 김 상무가 꿈꾸는 회사상이었다. 그것을 같이 만들어보자고 최 실장이 제안하는 것이었다.
김 상무가 D기업의 사정을 잘 모르지만 전해 듣기로는 여전히 전통적인 제조기업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직원들의 활력이 떨어지는 그리고 변화에 대한 저항이 큰 회사. 앞으로 회사를 맡아 경영하게 될 최 실장이 그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J기업에서 잘 지내고 있는 사람에게 SOS를 보내지 않았을까?
"상무님, 제 방으로 가셔서 이야기를 나누시죠."
최 실장이 김 상무의 손을 잡아끌었다. 최 실장의 사무실은 다른 건물에 있었다. J기업과 다르게 녹지가 잘 조성된 산업단지에 위치한 D기업은 마침 바로 옆이 산으로 연결되어 자연환경이 쾌적하였다. 우선 공기부터가 달라 상쾌한 기운이 김 상무의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푸른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점점이 떠 있고, 잘 정돈된 정원의 나뭇가지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김 상무와 최 실장은 빨간 보도블록이 깔린 길을 나란히 걸어 그 끝에 위치한 건물 현관으로 들어섰다.
새로 시작된 김 상무의 D기업에서의 여정. 성공할지 실패할지 예측할 수 없는 길. 이 년의 시간 안에 김 상무는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J기업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었다.
<終>
연재 브런치북을 마칩니다. 정해진 시간에 글을 올린다는 것은 역시 힘들더군요. 그래도 열 편쯤 쓸까 하고 시작했던 게 열여덟 편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동안 긴 이야기 읽어주신 독자님, 이웃작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훗날 기회가 되면 김 상무가 D기업에서 겪는 에피소드로 다시 한번 이야기를 엮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