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 씨는 남편 현우 씨와 함께 실버타운에 살고 있었다. 탁 트인 동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지어진 '블루헤븐 하우스'. 보증금 3억에 월 관리비가 천만 원이나 하는, 부자들만 입주하는 고급 실버타운이었다. 서연 씨 부부는 그곳에 입주한 지 삼 년이 지났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너무도 편했다. 밥 지을 필요도 없고 청소할 필요도 없고 세탁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서비스가 실버타운 운영회사로부터 제공되었다. 입주민들은 운동을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주변 산책을 하면서 여가를 즐기면 되었다.
서연 씨에게 남편 현우 씨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 서연 씨는 사십 대 중반에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하였다. 남편을 잃은 상실감에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거의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져 갈 때, 손을 잡아 준 사람. 그가 현우 씨였다. 서연 씨는 신경정신과 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이러다 죽겠다 싶을 때, 우연히 방문한 병원에서 그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 역시 이혼의 아픔을 겪으며 병원엘 다닐 때였다. 둘은 첫 만남에서 서로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병원에서 몇 번 마주쳤고,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처음에는 서연 씨 마음에 그를 받아들일 공간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위로해 주고 다독여 주는 그에게 마음이 조금씩 열렸다. 서연 씨는 그의 노력 덕분에 삶에 대한 의욕을 조금씩 되찾았고 꾸준하게 치료받으면서 마음이 건강해졌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전 남편에 대한 기억도 옅어져 갔다.
몇 년인가 시간이 흐르고 서연 씨가 현우 씨의 프러포즈를 받았다. 분홍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조용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꿈결 같은 나날이 흘렀다. 아이는 없었지만 둘이 더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서연 씨에게는 사별의 아픔도, 그에게는 이혼의 아픔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둘이 만났던 것처럼 그렇게 둘은 서로 사랑하며 나이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현우 씨에게 불행이 닥쳤다. 서연 씨가 밤늦게 귀가하던 날, 아내를 걱정하던 그가 집 앞 사거리에서 그녀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날아온 승용차에 치이고 말았다. 맞다. 차가 날아왔다는 표현이 정확하였다.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과속으로 직진하던 승용차가 좌회전하는 트럭과 부딪히면서 방향을 잃고 인도로 돌진하였으니까. 그는 서연 씨가 보는 앞에서 공중으로 붕 떴다가 가라앉았다. 그 후로 그는 일어서지 못했다.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하반신 마비로 두 번 다시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서연 씨는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다 자기 때문에 그가 다친 것 같았다. 차리리 집에 다 와 간다고 전화하지 말 것을, 그냥 연락 없이 집에 갔더라면 그가 나오지도 않았고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싶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가 오히려 서연 씨에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위로하였다. 그의 위로에 서연 씨는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자책하지 않기로 하였다. 대신에 자기가 늘 그 옆에 붙어서 손발이 되어 주겠다고 다짐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키기로.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에게 암이 찾아왔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서 생활하던 그의 생체리듬이 깨어지고, 그 틈을 비집고 작은 불씨처럼 숨죽이고 있던 암세포가 깨어나 그의 몸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그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많이 깊어진 후였다. 수술과 항암치료. 고통의 시간이 어어지면서 늙어버린 그의 몸은 더욱 쇠약해져 갔다. 병원 치료를 마치고 서연 씨는 현우 씨의 선택으로 블루헤븐 하우스에 입주하였다. 시설이 잘 되어 있고 의료진이 상주하고 있는 그곳에서, 그는 남은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거실의 통창 밖으로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점점이 배들이 떠 있고 그리고 그 위로는 흰구름이 둥실둥실 흘러가는 곳. 그는 침대에 누워서 창밖을 한없이 쳐다보곤 하였다. 그럴 때 서연 씨는 그의 손을 잡고 침대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삼 년 뒤 암이 재발하였을 때 그는 수술을 거부하였다.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이 힘든 수술을 버티기가 힘들었고, 예측 결과도 결코 희망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사랑하는 아내 옆에 누워 있다가 어느 날 조용히 떠나기를 원했다. 그의 고통이 심해질수록 강력한 진통제가 투여되었고, 서연 씨는 그런 그 옆에서 옛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러다 그가 잠이 들면 서연 씨는 조용히 일어나 창밖을 통하여 파도가 밀려와 갯바위에 부딪히며 포말로 부서지는 모습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무섭게 쏟아지던 어느 날, 현우 씨는 아내 서연 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입술을 깨물며 참고 있던 서연 씨는 끝내 오열을 터트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 서연 씨는 슬픔에 가슴이 미어졌지만 그래도 현우 씨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안도감에서랄까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의료진의 확인절차가 끝나고 그는 블루헤븐 하우스와 연계된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였다. 그리고 추모공원에 안치되었다. 서연 씨는 활짝 웃는 그의 사진액자 앞에 노란 국화꽃다발을 놓고 추모공원을 물러나왔다. 밖에는 블루헤븐 하우스의 의료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병간호에 지친 그녀에게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블루헤븐 하우스의 입주민에게 기본으로 제공되는 절차라고 하였다.
서연 씨는 의료진을 따라 진료실로 향했다. 복도 끝에 있는 방에 들어가자 MRI처럼 커다란 원통형의 기계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의료진은 그녀에게 기계 입구에 있는 침대에 누우라고 하였다. 그녀가 눕자 의료진 중 한 남자가 그녀의 머리 이곳저곳에 선이 연결된 센서 같은 것을 붙여 나갔다. 이마며 관자놀이에 닿는 따뜻한 감촉을 느끼며 그녀는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남자가 잠든 서연 씨의 머리에 붙어있는 센서를 떼어내었다. 그리고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남자는 나이프로 그녀의 정수리 부분을 동그랗게 긋고서 두피를 떼어냈다. 떨어진 두피 밑으로 은색 금속이 반짝하고 빛났다. 남자는 발이 여섯 개 달린 도구를 이용하여 정수리 부분에 있는 동그란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이크로 칩을 꺼내 조그만 상자에 넣었다. 작업을 마친 의료진은 그녀를 그렇게 내버려 둔 채 방을 나갔다. 그녀의 정수리에서 떼어낸 동그란 금속 뚜껑에는 'AI-2058-B6'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커다란 회의실에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정면 스크린에는 서연 씨가 남편 현우 씨와 함께 있는 다양한 일상이 흐르고 있었다. 금테 안경을 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번 서연 씨 사례는 아주 훌륭했지만 보완해야 할 부분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서연 씨와 현우 씨가 신경정신과 병원에서 만나는 장면부터 기억에 심었는데, 서연 씨는 그 이전의 기억도 일부 되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새로 포맷을 했지만 마이크로 칩에 남아 있던 이전의 데이터인지 아니면 AI-2058-B6의 몸체 어딘가에 남아있는 잔상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주부터 새로 시작되는 연지 씨 역할에는 새로운 칩을 사용하고 노이즈를 감지하는 센서를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5개월 전, 현우 씨의 법률 대리인이 블루헤븐 하우스를 방문하였다. 현우 씨는 암이 재발한 후 수술을 포기하고 호스피스 케어를 원했다. 확률이 낮은 수술을 하다 죽느니 차라리 평온한 일상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서연을 닮은 간병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시간이 촉박하였다. 즉시 계약이 이루어졌다. 프로젝트 비용 3억 원에 AI 렌탈료 월 천만 원 그리고 객실 사용료는 별도였다. 어차피 죽고 나면 재산은 단 한 푼도 그 가치가 없었다. 돈은 중요치 않았다. 현우 씨는 자신이 죽고 난 후 남는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하는 것으로 법률 대리인에게 말해두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현우 씨는 블루헤븐 하우스의 호스피스 병동에 입주하였다. 그리고 그 앞에 나타난 자신의 아내 서연 씨. 그는 깜짝 놀랐다. 비록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모습보다 10년은 젊어 보였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아내와 똑같았다. 서연 씨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나지막이 불러주는 노래도 그대로였다. 그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가 마치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였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서연 씨, 보고 싶었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의 손을 마주 잡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현우 씨, 저도 당신이 정말 그리웠어요. 우리 이제 헤어지지 말아요."
블루헤븐 하우스의 호스피스 병동에 적용되는 AI 기술은 놀라웠다. 고객의 요구에 꼭 부합하는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은 거의 창조에 가까웠다. 특히 특별한 기억을 주입함으로써 AI로 하여금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간병하는 것처럼 사고하게 만들고, 그 느낌이 고스란히 환자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환자 고객이 심적으로 정말 평온한 상태에서 인생을 마무리 짓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블루헤븐 하우스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향하는 고객가치였다.
현우 씨의 법률 대리인이 와서 그의 유품을 가져갔다. 그것을 끝으로 블루헤븐 하우스의 현우 씨에 대한 계약이 모두 종료되었다. 현우 씨의 법률 대리인과 면담을 마친 의료진은 AI-2058-B6가 누워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며칠 전 모습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의료진 중 한 남자가 나이프를 들고 이미 구멍이 난 그녀의 정수리부터 뺨을 타고 목부분까지 길게 그었다. 그리고 얼굴 가죽을 벗겨내었다. 그것은 사실 실리콘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조 피부였다. 얼굴 피부가 벗겨진 그 속에는 은빛의 이질적인 금속 덩어리가 있었다. 남자는 커다란 원통형 기계에 그녀를 발쪽부터 밀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정수리 부분에 새 마이크로 칩을 넣고 기구를 이용하여 동그란 뚜껑을 덮었다. 그녀의 머리 이곳저곳에 센서를 부착한 그는 기계를 작동시켰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기계가 돌고, 모니터 화면에는 영화의 스틸사진처럼 어떤 남녀의 모습이 바뀌고 멈추고를 계속하였다. 긴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기계가 멈췄다. 남자는 지퍼백에서 꺼낸 새로운 얼굴 가죽을 센서를 떼어낸 그녀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목과 몸이 겹치는 부분에 하얀 액체를 뿌렸다. 그러자 겹쳐진 부분의 인조 피부가 녹으면서 마치 원래 하나로 이어진 피부였던 것처럼 말끔해졌다.
다음날 아침, 앰뷸런스에 실려 한 노쇠한 남자가 블루헤븐 하우스의 호스피스 병동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연지 씨라고 불리는 여인이 의료진과 함께 진료실 복도 끝에 있는 방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그 여인은 호스피스 병동 3층의 한 객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