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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Aug 21. 2024

우리 형



 아이가 있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사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형만 셋이 있었는데, 나이 차가 열 살, 여덟 살, 네 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형 이야기는 네 살 위인 셋째 형과의 이야기입니다.


 시절,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형편에 다들 자식들은 왜 그렇게 많이 았는지 대부분의 집에 아이들이 네댓 명씩은 되었습니다. 더구나 남아선호가 뚜렷하여 아들 하나 얻기 위하여 계속해서 낳다 보니 칠공주네 팔공주네 하는 집도 있었습니다. '제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은 노동력이 중요시되던 농경사회에서 일손을 늘리기 위해 생겨난 말이지만, 손바닥만 한 밭뙈기조차도 없는 집에서는 전혀 사정이 달랐습니다. 하루 세끼는 고사하고 두 끼 먹기도 힘들었으니까요.


그 아이는 서울 변두리의 달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소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어머니는 젖이 나오지 않아 비슷한 젖먹이를  이웃 여자에게 동냥을 습니다. 때로는 얻어 온 쌀 한 줌으로 미음을 쒀서 아이에게 먹였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이어갔습니다. 자식이 없는 어떤 노부부가 '그렇게 애를 굶길 바에야 자기에게 달라고, 잘 먹이고 잘 키우겠다'고 하였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굶어 죽더라도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식구들을 먹여 살릴 능력이 안되었습니다. 아예 없느니만 못하였습니다. 노름에 빠져 얼마 없는 재산을 다 날리고 노름빚마저 졌으니까요.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이기 위하여 이웃에 돈을 꾸러 다니고, 온갖 행상이며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먹을 것을 구해오면 그날은 끼니를 때우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굶는 날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는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방치되었고, 겨우 네 살 많은 형이 동생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아이가 돌도 지나지 않아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 마당 구석에 피워 둔 연탄불 뚜껑을 손으로 짚어 화상을 입기도 하였습니다. 아이가 멀리 못 가게 허리에 줄을 매어 두었는데, 줄이 풀려 위험한 곳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도 아이가 불뚜껑을 헛짚는 바람에 손으로 움켜쥐지 않아 크게 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육십 년이 지나서도 손등에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덕분에 형은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부모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형이라고 해도 겨우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인데 말입니다.


형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식구들 내팽개치고 노름방을 전전하였고, 어머니는 자식들 먹을 걸 구하기 위해 집에 있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형이 초등학교 일 학년을 얼마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네 살 어린 동생을 돌보며 같이 놀아주어야 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변변한 장난감도 없고, 그 긴긴 날들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아이는 형을 의지하며 졸졸 따라다녔을 겁니다. 형은 다음 해에야 초등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을 두 번 한 셈이었습니다.


형은 몸이 단단하고 운동신경이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체육선생님 눈에 띄어 축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축구부에 들어가서 매일 열심히 공을 찼습니다. 소질이 있었던지 공격수를 하며 운동장을 뛰어다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잠자다가 한밤중에 경기를 일으키곤 하였습니다. 마치 뇌전증 환자처럼 눈이 뒤집히고 거품을 물고 사지를 떨었습니다. 당연히 응급차를 불러 병원에 가야 했으나, 돈이 없는 부모님은 그러지 못하고 겨우 이웃에 사는 한약방 원장님을 깨워서 자식을 보였습니다. 그런 일이 몇 차례 거듭되었고 발작 30여 분이 지나고 깨어나자, 그다음부터 부모님은 그러려니 하고 지켜보면서 입가에 흐르는 거품을 닦아내고 손발을 주무르는 게 다였습니다. 갈수록 병이 더 심해졌고 형은 결국 축구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축구를 그만두고 나자 서서히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발작도 점점 가라앉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영양실조 상태에서 운동을 심하게 한 게 발작의 원인이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였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지만 아버지는 애초에 자식들 공부시킬 생각이 없었습니다. 대신에 금은방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습니다. '공부는 해서 뭐 하냐, 일찍 돈 버는 게 최고지.' 노름꾼 아버지의 생각은 그랬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아동착취가 비일비재하던 시대였습니다. 최저임금도 안 되는, 겨우 점심값과 용돈 정도의 돈을 받으며 형은 금은 세공공장에 다녔습니다. 형은 눈물을 흘리며 일터로 나갔지만,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차비를 아끼려고 먼 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금은 비싸서 사지 못하고, 대신 은반지를 직접 세공하여 어머니 손에 끼워드리기도 하였습니다.


형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성격이 괄괄하였습니다. 경우가 틀리는 사람한테는 따지고 입바른 소리도 잘했습니다. 아버지한테도 대들었습니다. 제대로 먹이지도 못할 거 자식새끼 왜 낳았냐고 따졌습니다. 형이 개띠라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구마구 짖어댔는지도 모릅니다. 돌아오는 건 회초리뿐인데 말입니다. 결국 형은 일찍 독립해서 집을 나가 혼자 살았습니다. 그리고 가끔 집에 들렀습니다.


형이 한 번씩 집에 들르는 날, 아이는 너무 좋았습니다. 형이 먹을 것도 사 오고 용돈도 쥐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그동안 형이 무얼 하며 지냈는지 이야기 듣는 게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손재주가 좋고 눈썰미가 있는 형은 가구공장에 다녔습니다. 일을 마친 후에는 권투도장에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검정고시 공부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능사 자격증을 따서 해외 근로자로 갈 거라고 하였습니다. 형은 올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동생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부지런하고 활발한 형은 한 가지 일에 만족하지 않고 이것저것 하며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형은 집에 올 때 자전거를 타고 왔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뒤에 태워주곤 하였습니다. 힘이 좋은 형은 동생을 태우고도 언덕길을 거침없이 내달았습니다. 아이는 뒤에서 듬직한 형 등에 기대어 형의 땀 냄새며 체온을 느끼며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모릅니다. 그냥 형이 어디 가지 말고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야간대학교를 다녔습니다. 주경야독. 동생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형은 그런 동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사형제 중 유일하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차례로 학업중단 없이 정규 교육을 받은 동생. 아이가 가끔 형을 찾았을 때, 형은 지인들에게 동생을 소개하며 자랑하였습니다. '얘가 내 동생인데 정말 열심히 산다고, 스스로 돈 벌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머리도 똑똑하고 공부도 잘한다'.


하지만 아이는 형이 더욱 자랑스러웠습니다. 자기는 그래도 막내로 형들의 도움을 받으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지만, 형은 정말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정말 혼신의 노력을 하며 꿋꿋하게 자기 자리를 잡아갔거든요. 형은 중고등학교 졸업자격을 검정고시로 땄습니다. 그리고 나이 들어 회사를 다니며 역시 야간대학교를 다녔고, 석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공부를 계속해서 기술사 자격까지 취득하였습니다. 동생보다 열 배 스무 배 나은 자랑스러운 형이었습니다.


아이에게 형은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힘들 때 하소연하면 다 받아주고 아낌없이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항상 동생에게 먼저 전화해서 안부를 묻는 다정한 형이었습니다. 가끔 만나면 맥주잔을 기울이며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 같은 형이었습니다. 아이는 그런 형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 한편이 늘 든든하였습니다. 그런 형이었는데, 그런 형이었는데.....


형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심근경색인데 위독하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는 맥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등산도 자주 다니고 사형제 중 제일 건강한 형이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는 정신을 추스르고 차를 몰아 부산에서 용인으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채 도착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해야 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아직 한창나이인데 바보같이...


형은 만 육십육 세에 눈을 감았습니다. 입관할 때 형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힘들게 그리고 치열하게 세상을 살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은 평온한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형의 모습은 평온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찡그린 얼굴, 뭔가 불편한 얼굴. 고생하면서 살았던 이 세상, 여전히 미련이 남았서일까요? 아니면 남겨진 식구들이 걱정되어서일까요? 눈물이 났습니다. 뿌옇게 흐려진 눈앞에 형은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습니다. 가족이 그렇게 오열을 하는데 못 들은 체 누워있었습니다. 야속한 형.


이틀 후, 형은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함에 담겼습니다. 그리고 납골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형과 작별을 하였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너무도... 너무나 빠른 이별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형과의 기억이 떠올라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이 어떤 형이었는지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형이었는지. 그렇게 해야 형이 언제나 내 가슴에 남아있을 것 같았습니다. 못난 동생이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형님, 부디 이승에서의 미련 훌훌 털어 내시고 저 세상에서 편히 쉬십시오. 형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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