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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살맛 나는 세상(중)

by 이은호



국민학교나 중학교에 다닐 때 가장 부끄러운 일 중 하나가 친구들이 우리 집엘 찾아오는 것이었다. 부엌과 다락방이 딸린 단칸방에 살면서 변변한 살림살이도 없고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집. 찢어지게 가난한 집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게 정말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아이들이 집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그것도 내가 마음에 두었던 여자애를 포함하여 같은 반 여자애 네댓 명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주인집 넷째 그 얄미운 계집애가 길안내를 하여 찾아온 것이었다. 우르르 들어서는 아이들 모습에 얼굴이 빨개진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방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밖으로 내빼버렸다. 두 시간쯤 밖에서 배회하다가 여자애들이 돌아간 뒤에 집에 돌아왔더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키 크고 예쁘장하게 생긴 *영이라고 하는 아이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이것저것 묻더라. 걔 아버지가 중학교 선생님이라고 하던데. 걔가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니니?' 안 그래도 그 아이에게 집안 꼴을 들킨 나는 부아가 치밀어 어머니에게 톡 쏘아붙였다. '좋아하긴요! 나 같은 애를 좋아할 여자애가 어딨겠어요?'


각 학급에는 학급 반장, 부반장 그리고 학급 회장, 부회장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회장 그리고 내가 부회장이었다. 매주 학급 어린이회를 주관하고 전교 어린이회에 참석하는 게 주 임무였다. 반 아이들 인기투표로 그 아이가 회장, 내가 부회장이 되었지만, 천생 여자인 그 아이는 부끄러움이 많아 회의 주재를 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내가 자주 나섰고, 전교 어린이회에도 같이 참석하였으나 주로 내가 발표하였다. 그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애가 우리 집은 어떻게 오고 어머니에게 뭘 그렇게 물어보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날 교실에서 만난 그 아이는 살살 웃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부끄러운 집안 사정을 들킨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날 저녁, 여자애들을 집으로 데리고 온 그 얄미운 주인집 넷째를 불러내 따졌다. 그 애는 '*영이가 너네 집에 가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혼자 못 가고 친구들을 대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도 진짜 하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라며 눈시울이 빨개져 억울해하였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오히려 미안해졌다.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 더 따지지 못하고 일단락되었다. 그 이후 회장 여자애하고는 매주 어린이회에 나가면서 함께 다녔지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가 쭉 이어졌다. 한 번씩 그 아이가 뭔가 말하려고 달막 달막 하였으나 나는 그때마다 짐짓 모른 채 외면하였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보는 졸업식날 그 아이가 자기 집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꼭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이미 마음에 흠집이 난 나는 그 아이에게 전화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 아이와의 인연이 끝났다.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에 진학하였지만 집안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1학년 초 일요일에 선생님과 나를 비롯한 반 아이 몇 명이 등교하여 학급 환경미화 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날 선생님께서 무슨 일인지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분부라 어머니도 거절을 못하고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함께 집을 나섰다. 교실에 도착하여 우리가 미화작업을 하는 동안 어머니는 선생님과 면담을 하셨다. 그리고 30여분 뒤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내가 따라 나가서 어머니께 차비를 드렸어야 했는데, 철없는 나는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어머니 지갑에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을. 그날 어머니는 버스로 여덟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가셨다. 그것도 바람이 여전히 쌀쌀한 3월에. 집에서 학교로 오는 버스에 오를 때, 지폐를 내고 내가 거스름돈을 받았었다. 돈은 그게 다였다. 왕복 차비. 그런데 어머니가 교실을 나가실 때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나에게 차비를 달라고 차마 말씀을 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나중에 어머니가 집까지 걸어오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그깟 버스비가 없어서 그 먼 길을.


선생님께서 나를 반장을 시키려고 하는데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한 것이었다. 돈. 결국은 돈이었다. 아들은 학급 반장을 하고, 어머니는 학부모회에 참여하고. 그게 우리 집 형편에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어머니는 선생님께 집안형편을 말씀드리고 사양하셨고, 없었던 일이 되었다. 애당초 반장 같은 거에는 관심이 없었다. 집안형편을 뻔히 아는데 그냥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돈 들어가는 일은 어머니 어깨에 짐만 지워줄 뿐인데, 그런 건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체육선생님이셨다. 그리고 체육선생님을 만난 게 나에게는 정말 행운이었다. 머리 쓰는 걸 좋아했지 몸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나의 체력은 완전 바닥이었다. 체력측정이 있는 날, 턱걸이 '0'개, 윗몸일으키기 겨우 8개였다. 선생님이 '은호야, 그 체력 가지고 고등학교에 가겠냐?'고 하셨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매일 운동장으로 나갔다. 철봉에 매달리고 운동장을 뛰었다. 처음에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헥헥거렸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나아졌다. 그리고 육 개월 후 2학기 체력측정이 있는 날. 나는 보란 듯이 훨훨 날았다. 턱걸이 20개, 윗몸일으키기 30개를 가뿐하게 넘었다. 선생님이 깜짝 놀라셨다. '역시 은호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잘하네.'하고 칭찬해 주셨다. 아마도 그때가 시작이었을 것 같다. 뭐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내 마음속에 움트기 시작한 때가. 그걸 시작으로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가 전부인 내가 꿋꿋하게 버티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2학년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몇 명 있었다. 일요일에 한 번씩 만나 놀러도 가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하였다. 그중 한 명이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공부도 잘해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그 애 아버지가 내과병원 원장이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아이는 마음씨까지도 고와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함께 놀러 다닐 때 그 친구가 돈을 거의 다 썼는데, 친구들 앞에서 절대 있는 체 잘난 체를 하지 않았다. 자기가 돈을 쓰면서도 행여 친구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다. '좋은 일이 있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용돈이 생겨서' 등 번번이 자기가 사야 하는 이유를 내세웠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자기 아버지로부터 그런 쪽으로 엄하게 교육을 받았다고 하였다. 돈으로 잘난 체하지 말고 인간 됨됨이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래야 좋은 친구들이 모인다고. 그 친구가 그 후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잘 성장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고등학교 시절 역시 내 주위에는 좋은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급성적이 5등 안에 들어야 원서를 써줄 만큼 괜찮은 학교였기 때문에 똑똑한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동기들 대부분 집안이 가난하거나 뭔가 결핍이 있는 경우가 많아 서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친하게 지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학년 첫 월말고사를 끝내고 난 큰 충격을 받았다. 학급 석차 60명 중 15등. 태어나서 그런 성적은 처음이었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이래서는 안 되지 싶었다. 그리고 정말 코피를 쏟을 만큼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결과 전 과목을 다 치는 중간고사에서 학급석차 1등, 전교 7등을 하였다. 그 성적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 뒤로는 성적이 오르락내리락했는데, 그 편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리고 공부대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학급 반장과 학도호국단 중대장을 하였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중대장 명령을 받고 교련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갔다. 두 분이 계셨는데 키가 작고 뚱뚱한 선생님이 나를 보시고, '키만 컸지 몸이 약해서 제대로 하겠어?'라고 하셨다. 그 선생님은 키에 대한 핸디캡이 있으셨던지, 키 큰 학생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체벌할 때 뺨을 주로 때렸는데, 위로 쳐다보며 뺨을 때리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지 늘 교단 위에 올라서서 자신의 위치를 높이고 뺨을 때렸다. 짧고 굵은 팔뚝이 그리는 반경도 크지 않은 데다 박자에 맞춰 고개마저 까닥거려서 마치 일본의 손 흔드는 고양이 인형이 팔을 휘젓는 것 같았다. 때문에 정작 맞는 친구는 아팠겠지만 뒤에서 구경하는 친구들은 선생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키득거렸다. 그러다 걸려서 불려 나가 대신 뺨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그 선생님과 다르게 키 크고 날렵한 다른 교련선생님은 나를 보고 '이 학생은 자세가 좋아서 괜찮겠는데.'라고 하셨다. 다음날부터 중대장들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나를 좋게 보았던 선생님께서 교육을 맡으셨다. 교육 후 선생님께서 혼자 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을 절대로 외모만 보고 평가해서는 안된다. 네가 중대장 역할을 얼마나 잘하는지 똑똑히 보여줘라.'



해마다 장학사를 모시고 평가받는 교련사열이 있었는데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다. 특히 중대 병력을 이끌고 지휘관 앞을 행진해 가는 분열식에 있어서 중대장 역할이 중요하였다. 그것을 위하여 교련시간마다 집총 16개 동작과 더불어 제식훈련을 하였고, 실전 한 달을 앞두고는 방과 후 전교생이 운동장을 뺑뺑 돌며 행진하였다. 중대병력을 이끌고 흑먼지를 마시며 '우향 앞으로 가' '좌향 앞으로 가' '줄줄이 우로 가' '줄줄이 좌로 가' '우로 봐' 등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2학년 때는 1학년 중대장을, 3학년 때는 동급생인 3학년 중대장을 맡아서 교련사열을 받았다.


학도호국단 간부를 하면서 외부행사에도 참석하였다. 매년초 선생님들과 함께 충렬사에 참배하였고, 이충무공 탄신일에 시가행진을 하고, 한산도 이충무공 사당에 견학도 가고, 경주 화랑교육원에 연수도 갔다. 특활반 활동으로는 MRA(도덕재무장 운동)에 들었고, 친한 친구가 참여하는 원불교 모임에도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다른 학교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덕분에 내성적인 성격이 활동적으로 바뀌었다. 역시 친한 친구가 원예반에 있어서 야외 채집에 나설 때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생물반을 새로 만드셔서, 생물반 반장으로 특활반 활동을 추가하였다. 친한 친구 중에 청춘사업에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 있어서 그쪽 방면으로도 함께 어울려 다녔다. 다른 학교 여학생들과 미팅을 하기도 하고 기억에 남을만한 아찔한 사건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3학년 겨울 막바지에는 몇 명이 의기투합하여 시내에서 군밤장사도 하였다. 하여튼 고등학교 시절 정말로 공사다망한 시간을 보냈다. 공부가 다였던 범생이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면서 풍요롭고 알찬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할까? 친구들과 너무 많은 좋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공부보다는 그때의 그 세상을 선택할 것 같다.




군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친구들에게 편지를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회사에 입사하여 기숙사 룸메이트를 했던 친구는 마치 연인 사이에 밀어를 속삭이는 듯한 잔잔하고 부드러운 사연을 보내기도 하고, 세상에 군에 있는 군바리에게 여친을 소개해 달라고 떼를 쓰는 녀석도 있었다. 저마다의 사정 속에 그래도 청춘의 푸른 꿈을 함께 꾸며 소중한 시간을 공유했던 친구들. 그중 몇몇은 결혼 후 가족 모임을 이어가기도 하고, 몇몇은 여전히 소식을 주고받고 있다. 어렵고 힘들었던 청춘시절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서로에게 위로를 받던 소중한 친구들. 그들이 있었기에 그 시절을 잘 버티고 오늘까지 살아내지 않았나 싶다.



※ 그래서 살맛 나는 세상은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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